에스라 1


1. 1-4절을 대하 36:22-23과 비교해보자.

    기본적인 내용은 글자까지 동일한데 조금 더 추가되었다: 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유다 예루살렘으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는 말씀과 4절이 추가 되었다. 대부분의 번역본은 생략하고 있는데, 이 두 부분의 첫 글자는 ‘그리고’이다. 앞의 내용과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에스라는 역대기의 계속인 셈이다.

2.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이란 표현은 에스라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이다(1:4, 3:3, 5:2, 6:3).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는 법인데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각 민족이 고유의 신을 섬기도록 허락한 다리오의 입장에서는 성전이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하나를 구별하려다보니 지명까지 붙인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바사왕 고레스를 감동시키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1): 일반적인 시각으로 설명한다면 이렇다. 바사왕 고레스는 점령 민족의 자치를 허용했던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고레스는 바벨론의 관리들을 그대로 앉히고, 유화정책을 폈으며 자신의 군대가 정복민들을 학대하지 못하게 했다. 정복한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였고, 바벨론 포로민들이 원거주지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감동시키셨다고 말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인 해석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고레스로 하여금 이런 정책을 가지게 하신 것인가? 고레스가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에 대한 문제다. 이것이 신앙인과 불신자의 차이다. 이런 일에 대하여 약 2세기 전에 이사야가 정확하게 예언을 하고 있다(사 44-45장). 예레미야도 포로생활이 70년에 마칠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29:10).

    어떻게 보면 신앙은 주관적인 체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다. 사람을 넘어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신앙이다. 오늘 나를 통하여 무슨 역사를 하실까?

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은 내용이 무엇인가?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것(렘 25:11, 29:10): 엄청나게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서는 포로에서 놓여나는 부분만을 가리킨다.

5.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누구기에 이런 명령을 하는가?

    바벨론을 점령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이란 바벨론을 점령한 첫 해(BC 538)라는 뜻이다. 실제로 고레스가 바사의 왕이 된 것은 오래 전이다(BC 559).

6. 고레스는 신앙이 참 좋았나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로다.’ 했으니... 고레스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물론 하나님의 감동이지만 그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있을까?

    다니엘(단 6:28): 바사왕 고레스(혹은 다리오)가 바벨론을 점령했음에도 다니엘을 그대로 총리에 둔 것은 그만한 신뢰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다니엘이 고레스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말을 알게 했을 것이며 이런 정책을 수행하도록 권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포고문의 입안자가 다니엘 아니었을까? 고레스의 정책, 다니엘의 헌신, 하나님의 섭리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고레스만 본다. ‘고레스가 이스라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도 그렇게 했는데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섭리냐?’는 것이다. 반면에 맹신자들은 하나님만 본다.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셨다는데 무슨 딴 소리?’냐고 남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돌보시느라고 고레스를 이런 방식으로 쓰시는 바람에 덩달아 다른 모든 백성들도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상 중근동에서 이런 정책을 편 왕은 고레스 밖에 없다는 점도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임을 보여준다.

7. 그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도록 허용하신 분이 이제 와서 고레스의 입을 통해서 다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신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스라엘이 변했다기보다는 작정하신 형벌의 기간이 다 찼기 때문이다: 초라한 성전이든, 화려한 성전이든 성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식 백성들을 인도하시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만,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기 위한 가장 상징적인 행위가 성전건축이었기에 건축을 명했을 뿐이다. 성전건축이 곧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8. 유대인 가까이에 사는 것은 재산상으로 위험하다(4). 종종 그들에게 금과 은을 주라는 명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다른 예가 있는가?

    출애굽 때(출 12:35-36): 자기 재산인데 어떻게 즐거이 줄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불법으로 취한 것이 있으면 일종의 속건예물을 드리는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웃에게 부조하는 것이나, 오래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영영 떠날 때 전별금 주는 것처럼 생각하면 되겠다.

9. 왜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만 돌아오는가? 다른 지파 족장들은?

    바벨론이 침공한 유다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은 대부분이 이 두 지파 소속이기 때문이다. 다른 지파는 북이스라엘에 속해 있다가 앗수르에 의해 흩어졌다.

10. 70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면 80, 90세 정도되는 분들은 돌아오려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이미 바벨론의 삶에 익숙한 자들이다. 돌아오려고 나서는 일이 쉬웠을까?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외국에 익숙해버린 아이들 때문인 경우가 많다. 석사, 박사 거치면서 10년도 채 안 되는 세월에도 그렇게 되던데?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일이다(5): 신앙을 찾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말하자면 포로로 잡혀가서 살면서도 나름대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11. 고레스가 ‘다 올라가라’고 했으니 모두가 돌아왔을까? 돌아오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나님께 감동된 자만 다 일어났다(5):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은 5만 명 정도였다(회중 42,360명, 노비 7,337명). 70년이라면 생활기반이 다 잡힌 상태다. 말하자면 생활기반을 버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먼 길(약 2,400km)을 가서 새로운 생활터전을 잡아야 한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말(사 10:20-23, 렘 31:8)을 기억하는 신앙을 지닌 사람만이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났던 아브람처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갔던 청교도들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우리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며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12. 여호와의 전 기명들이 바벨론 신들의 창고에서 70년을 지냈다(7). 치욕 아닌가?

    자식을 징계하는 부모의 고난이다: 느부갓네살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다른 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런 치욕을 스스로 감수하셨다.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법궤도 같은 현상이다(삼상 4:5-11). 징계를 당하는 자식보다 징계하는 아버지가 더 아프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함부로 까불다가는 벨사살 꼴이 난다(단 5:2, 30).

13. 고레스로부터 여호와의 전 기명을 받은 유다 목백 세스바살이라는 사람은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5:14, 16에도 이름이 거론될 뿐이다. 이 귀한 기물을 가지고 어디로 사라졌나?

    이 백성을 인솔하고 귀환한 지도자 스룹바벨과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세스바살은 바벨론식 이름이다. 왕의 명에 의해서 귀하게 다루어질 기명들이니 당연히 백성을 인솔하는 지도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14. 30 + 1,000 + 29 + 30 + 410 + 1,000 = 5,400?

    2,499: 더하기를 잘못 한 걸까? 비교적 중요한 기명은 2,499개 인데 전체는 5,400개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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