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3장 |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목청을 높였다(4-24, 25-32장). 이제 유다는 완전히 망해버렸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끝이 아니다. 선지자는 또 이스라엘의 회복을 외쳐야 한다. ‘지금이라도 돌이키라’고 외쳐야 한다. 심판을 외칠 때도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있었지만(14:22, 20:40-44) 이제 본격적인 회복의 메시지를 외치기 시작한다. 2.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파숫군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죽은 사람의 죄(6, 8의 자기 죄): 죽음은 범죄한 인생의 죄값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숫군에게 묻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파숫군에게 죄값을 묻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 탓이라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3. 선지자의 역할은 파숫군이다. 듣든지 안 듣든지(3:11) 위험이 있다면 파숫군은 나팔을 불어야한다. 이와 비슷한 말씀인 딤후 4:2, 고전 9:16을 참고하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사명이 있는가? 전도: 오늘날 성도는 이런 파숫군의 책임이 있다. 성도가 어떻게든 때를 잘 타서 말씀을 전해야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다만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표현에 너무 집중해서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럴 여유가 없겠지만. 4. 하나님께서 죽으리라고 했으면 반드시 죽는가? 그 말을 듣고 돌이키면 산다(8+11):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사약을 받고 죽는 것처럼 죽지는 않았다. 우리보다 열 배나 더 오래 살았다. 죽어야할 인생에게 오히려 살아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창 3:15). 돌이키기만 한다면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무슨 이유인가?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때문(11):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두렵게 여기는 분들이 많다.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구약의 하나님도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쉽게 알 수 있다. 심판을 작정하시고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든지 마음을 바꾸셨다. 의인 한 사람이라도 찾는다면 예루살렘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렘 5:1). 6. 선지자는 당시 유대인들의 그릇된 구원관에 일침을 가하는 셈이다(12). 범죄하면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이런 구원관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신들을 선택된 민족이라고 여긴 생각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은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 생각이 잘못이라는 지적이다(18:19-20. 구원은 조상 덕분도 아니요 과거에 행한 의 덕분도 아니다.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은혜로 임하는 것이다. 7. 하나님께서 ‘너는 살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을까(13)? 변질: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가 변하여 ‘자기의’가 된 셈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의만 의지하면서 교만하여진 상태(=스스로 믿고)를 가리킨다. 그러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을 잊은 자체가 죄다. 8. 하나님께서 ‘너는 정녕 죽으리라’고 해도 살아나는 방법이 있는가? 돌이키면 된다(14-16): 돌이켜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리라고 하신다. 노름판에도 일수불퇴, 낙장불입이란 말이 있고 일국의 법도 한번 공포되면 변개치 못하는데(단 6:8)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은 그렇게 인자하신 분이시다. 9. 하나님의 심판이 전적으로 개인의 행위를 근거로 시행되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떤가? 공평치 않다(17): 특별 대우를 받아오던 사람이 어느 날 공평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같다.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면 특별한 대우나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거짓말을 했음에도 징계를 받은 것은 바로나 아비멜렉이었던 것이 좋은 예다. 그랬는데(=사랑 모드) 죄를 지은대로 심판하고, 법과 의를 행한대로 살리겠다(=공의 모드)니 자신의 행한 바는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처사만 불만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10.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18개월 뒤) 도망한 자가 선지자에게 나아왔을 때 입이 열렸다는 게 무슨 말인가(21-22)? 그 동안 선지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는 말인가? 한동안 벙어리로 지낸 모양이다(참고 3:26-27, 24:25-27, 눅 1:20):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선지자가 갑자기 말문이 터지더니 쉬지 않고 외쳤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에 힘을 보탰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기대하면서(겔 24:27). 11. 말을 못하던 선지지가 갑자기 말을 하게 된 것은 누구의 능력인가? 외견상, 놀라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22): 소리를 지르자 여리고가 무너진 것이나 모세가 팔을 내밀자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다 하나님의 능력이다. 나타난 현실과 그 현실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별해야한다. 바울과 실라의 찬송때문에 옥터가 흔들렸을까? 그렇다면 찬송할 때마다 그랬을까? 12.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 이제 황무한 땅이 되었다. 다 빼앗겨버렸다. 그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아브라함보다 자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에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다함(2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숫자가 훨씬 더 많으니 그만큼 더 유리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숫자로 밀어붙여? 간 큰 인간인지, 머리가 나쁜 인간인지... 원. 13. 하나님께서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땅을 다 빼앗긴 셈인데도 여전히 이런 비극이 왜 그들에게 임하였는지 모른다. 비극의 원인을 본문에 있는 간단한 말로 하면 무엇인가? 여호와를 몰라서: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는 것은 율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14.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가?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온역에 죽게 하신다.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 지하 깊은 곳으로 피하면 어떻게 될까? 물로 덮어버린다(사 28:17). 15. 선지자가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왜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할까?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16. 백성들이 선지자에게로 몰려왔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회개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호기심, 재미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나 하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잘 하는지 못 하는지 평가하려는 자세로 듣는 것과 비슷하다. 17. 왜 선지자를 보고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라고 하는 걸까? 선지자가 사랑 노래를 부르고 다녔나? 아마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처럼 읊조렸기 때문 아닐까?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전부가 시이다. 선지자를 선지자라기보다는 노래 잘 하는 자로 여겼다는 것은 결국은 선지자가 전한 메시지를 재미로 듣고 불렀을 뿐이었다. 찬양에 은혜를 받는다고 하면서 그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고 리듬과 분위기에 흥분하면 그것은 찬양이 아닐 수도 있다. 18. 매를 드는 아버지도 자식이 죽으라고 매를 드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읽어내는 것과 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는듯한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이런 마음이 문득 드러나는 구절이 있다면 어느 구절인가? 11절: 이것이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