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


1. 수재들만 모인 고등학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일까? 실력있는 선생님?

    잘 가르치는 것보다 공평하게 대하는 선생님이 좋단다: 공부야 정 답답하면 스스로도 할 수 있단다.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은 아래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2. 기도는 달라고 떼를 쓰는 것보다는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밥이 아니라 찬송받으실 분이시다. 그런데 기도할 때 깨어있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설마, 졸지 말라는 건 아니겠지?

    기도하는 내용을 알고 하라는 말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기도하는 수가 있을까? 가령, 장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는 장로라는 직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이해하고 그것을 감당할만한 각오를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함부로 기도하는 것은 정신없는 기도다. 입다처럼! 떼쓰는 기도보다는 감사하는 기도가 낫고,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깨어있는 기도다!

3. 불신 친구를 대할 때 지옥 갈 자식이라거나 사탄의 자식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라고 권하고 있는가?

    전도할 대상으로 여기고 지혜롭게 대하라(3-5): 마구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전도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생각은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한다.

4. 바울은 지금 어디에 매여있으며 무슨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도록 사명을 받았으며 이것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감옥에 매인 것은 매인 것도 아니다.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일뿐!

5. 헬라인들은 소금을 아주 귀중하게 생각해서 돈으로 여겼다. 월급을 소금으로 준 데서 영어의 salary란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말을 하라는 것은 말을 어떻게 하란 뜻일까?

    너무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게! 입이 너무 무거워도 안 되고, 너무 가벼워도 안되고, 잘 조절하라는 것이다. 간이 잘 맞는 음식을 좋아하게 되듯이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게 하는 말을 하라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지혜롭고 재치있는 말을 하라는 셈이다.

6. 두기고는 설교자나 전도자도 아니면서 중요한 일에 꼭 끼여 있다(행 20:4, 엡 6:21, 골 4:7, 딤후 4:12, 딛 3:12). 뒤에서 이렇게 헌신하는 사람 없이 위대한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를 본문에서 찾는다면 무엇인가?

    두기고를 설명하는 세 가지 표현(형제, 일군, 종)이 그렇다. 사랑받는 형제, 신실한 일군,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두 가지에 불과한 말이 유독 두기고에게는 세 가지나 된다. 여기서는 아마 이 편지를 전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7. 글의 내용이나 분위기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럽고 골로새 교인들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자신의 처지를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같이 있는 동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보니 불쑥 자신이 감옥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디에 그 표현이 있는가?

    10절: 자신이 갇혀 있어도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는 골로새 교인들을 더 염려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8-9).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기도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8.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이었는데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란 뜻일까?

    같은 표현이다: 빌레몬이 골로새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17절의 아킵보가 빌레몬의 아들로 보인다, 몬 1:2). 전설이긴 하지만 빌레몬은 후일에 골로새의 감독이 되었단다.

9. 아리스다고는 유독 ‘나와 함께 갇혔’다고 한다. 영적인 말일까, 진짜 옥에 갇혔다는 말일까? 아니면 양쪽?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힌 적이 여러 번 있으므로 진짜 옥에 갇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의 소동을 만나 바울과 같이 체포되었고(행 19:29),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에 드로아에서 다시 동행자가 되었다가(행 20:4,6), 바울이 죄수가 되어 배로 로마로 갈 때도 함께 했다(행 27:2). 바울이 로마 옥에 있을 동안 내내 그를 수종 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몬 1:23).

10. 바나바의 생질 마가는 이전에 대형 사고를 친 적이 있다. 무슨 사고를 쳤었는가?

    선교지에서 무단이탈한 일(행 13:13)로 바울과 바나바의 사이를 깨버렸다(행 15:36-41).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발가벗고 도망쳤다. 그런데 지금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고 있다. 바울도 마가를 동역자라고 부른다(딤후 4:11, 몬 24). 아마도 바나바가 마가를 잘 지도해서 바울을 돕도록 했을 것이다(나중에는 베드로를 도왔다). 바울과 바나바가 화해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11.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예수(유스도)를 할례파란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을 지독하게 싫어하던 바울이 왜 할례파를 소개하고 있을까?

    여기서 할례파란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이방인 전도에 사명을 받은 탓이긴 하겠지만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무능(?)했던 모양이다. 동족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한 아픔이 묻어난다.

12. 온갖 어려움을 다 돌파하던 믿음의 용사 바울도 위로가 필요한가?

    위로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써서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보내는 것도 위로하기 위함이다(8). 성도들도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13.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에 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를 언급(13) 할까?

    이웃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3장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면서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말씀은 동쪽의 골로새에서 오는 냉수와 히에라볼리(현, 파묵깔레)에서 오는 온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 세 곳에 교회를 세우고 힘을 다해 섬긴 사람이 바로 에바브라다.

14.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분량으로 보면 신약 성경의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을 기록한 저자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12제자도 아니요, 히브리인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직업이 의사라는 것(14): 바울이 빌립보 선교에서 잠시 등장하였다가(행 16장의 ‘우리’ 부분) 3차 귀로에 동행하며(행 20장부터 다시 시작된 ‘우리’ 부분) 끝까지 바울을 도왔다. 그러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총정리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그의 글은 의사답게 자세하게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다. 헬라인 의사요 저술가였다. 잘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이렇게 잘난 사람이 잘난체 하는 사람(유대인)과 함께 일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끝까지 바울과 동행한 것을 보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15. 무슨 교회가 집에 있지?

    당시의 교회는 대부분 가정 교회였다: 오늘날과 같이 으리으리한 건물을 소유한 교회가 아니다. 그러니 건물을 교회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없었겠다.

16. 편지는 받는 사람만 읽는 것 아닌가?

    개인적인 사신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는 공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편지를 교회들이 돌려가며 읽다가 결국은 정경으로 고정된 것이다. 그 중에는 분실된(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나 고린도에 보낸 눈물의 편지(고전 5:9)가 그런 예다. 빌레몬서는 극히 개인적인 편지임에도 회람되었던 모양이다.

17. 친필로 문안하는 것은 어떤 효력이 있을까?

    위조방지: 본문을 다른 사람이 대필했더라도 마지막 부분의 친필이 이 내용이 바울의 것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요즈음 화폐의 위조방지 기능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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