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2장


1.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 이것이 데살로니가 후서를 쓴 이유이기도 하다.

2.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를 쓴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면?

    예수의 재림 때문에 동심(動心)하거나 두려워하는 자를 교훈하기 위해서(2): 동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이나 가족을 팽개치고 재림만 기다리거나 이미 재림했다고 생각하고 성급하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재림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성도들이다.

3. 당시의 성도들이 그릇된 교훈인 줄도 모르고 서로 다툴 때 흔히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어디에 두었을까?

    영, 말, 사도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2): 영은 초자연적으로 받은 계시를 말하고, 말은 어떤 사람들 통해서 전해들은 교훈을,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는 가짜 편지를 가리킨다.

4. 재림의 광경은 두 가지 장면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이다. 그렇다면 다른 또 하나의 장면은 무엇인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진 모임: 환영행사인가? 선발된 자들의 구별인가? 소위 휴거를 가리킨다(살전 4:17).

5. 바울은 재림의 전조 현상으로 누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가? 본문에 나타난 표현을 사용하지 말고 모든 표현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를 찾아보자.

    적그리스도의 등장: 배도하게 하는 자,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대적하는 자,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자, 전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재림의 전조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이 너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쩌지? 아마도 이런 현산을 볼 때마다 예수의 재림을 생각하며 이겨내기를 바라는 것 아닐까?

6. 4절에서 ‘일컫는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면 ‘범사에’가 의미하는 바 혹은 수식하는 말은 무엇일까?

    ‘뛰어나 자존하여’를 수식한다. 혹은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와 동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고 경배를 강요했던 로마황제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후에 일어났던 박해를 경험한 성도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적그리스도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일이 나타나겠지만 우리가 재림의 징조로 기억해야할 말씀은 ‘온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가 더 좋겠다.

7. 설교하는 사람의 착각 중에 하나는 ‘설교시간에 말한 것을 성도들이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보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바울도 그런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5)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한 두 번 얘기한 것도 아닌데(원어의 시제상)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하는 셈인데 가르쳤다고 다 기억한다면 훌륭한 학생이게?

8. 대적하는 자가 언제 활동을 시작하고 언제 나타나는가?

    활동은 이미 시작하였지만(7) 나타나는 것은 정해진 자신의 때가 되어야 나타난다(6): 그 전에는 억류되어 있다. 대적하는 자가 제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막는 자가 자리를 옮길 때까지 불법이 아무리 활동을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로 ‘불법의 비밀’이란 말을 NIV는 the secret power of lawlessness로 번역하였다. 대적하는 자가 자기 뜻대로 아무 때에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의 표현을 빌린다면 무저갱에 갇혀 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사탄도 별 수 없다는 말이다.

9. 불법한 자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법을 행하려고?

    죽임을 당하려고(8): 성도들에게 닥쳐오는 환난이란 것이 이 사탄의 비밀스러운 힘이다. 신비롭다는 뜻이 아니라 억류되어 있는 자가 몰래 몰래 호작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10. 사기 당하여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가 그럴만한 잘못이 자신에게도 있다. 공짜를 좋아한다거나 노력하는 것 이상의 이익을 노리는 자가 사기꾼에게 잘 걸려든다. 악한 자에게 걸려드는 자는 어떤 자들인가?

    멸망하는 자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사단이 역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성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기꾼이 극성을 부려도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1. 사단의 힘을 빌린 악한 자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

    온갖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 능력, 표적, 기적도 있는데 문제는 속이는 것이다. 나쁜 선생님이라고 나쁜 짓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잘 가르칠 수도 있고, 실력이나 열심도 있지만 딱 한 가지가 잘못되면 나쁜 선생이 된다.

12. 악한 자에게 속임을 당하고 멸망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진리를 받지 아니한 탓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탓인가(9-12)?

    둘 다 옳다: 악한 자는 사단의 역사를 따라서 악한 짓을 행하고 진리를 받지 아니함으로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악한 자의 선택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은 책임은 악한 자에게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관 속에 있더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인간(=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한 오묘한 섭리 탓에 생긴 일이다.

13.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애착을 가진 이유는 무엇인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기 때문,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고 진리를 믿게 하셨기 때문(13),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셨기 때문, 상받을 자이기 때문(14):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 했기 때문 아닐까? 그런 고생 끝에 얻은 성도이기 때문 아닐까?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일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이렇게 애정을 보이는 것이다. 자신들의 수고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다. 아! 위대한 사역자 바울!

    많은 선수가 시합을 해도 시합이 끝나면 상받을 사람만 따로 챙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가장 위대한 상)을 얻을 사람들이다. 그러니 챙겨야지!

14. 15절의 ‘말’과 ‘편지’는 2절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2절은 가짜를 말하고 15절은 진짜를 가리킨다.

15. 조상들의 유전(=전하여 준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이던(갈 1:14, 골 2:8) 바울이 자신의 유전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좀 건방진 것 아닌가?

    누구의 유전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전의 내용이 올바르냐의 문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였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전하였느냐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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