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8장 |
풍성한 연보: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많은 환란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수 믿고 이런 환란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결과가 풍성한 헌금이었다. 정말로 수준높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2. 헌금을 왜 ‘은혜’라고 둘러 표현하는가(1, 4, 6, 7)?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그 일부를 돌려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금이나 뇌물처럼 내는 헌금은 은혜가 아니다. 3. 마게도냐 성도들은 무엇때문에 연보(=단순함, 관대함)를 풍성하게 하였는가? 많은 환란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진정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었기 때문에 당하는 환란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결과가 풍성한 연보였다. 뭔가를 더 얻기 위해서 하는 오늘 우리의 헌금 자세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참고로, 이 환란은 로마 황제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가장 끈질긴 것이었을 터이지만 말씀대로 살려면 이래저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4. 연보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힘에 지나도록?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3),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5): 마게도냐 성도들이 이렇게 연보를 했다는 자랑이다. 헌금은 자신을 주께 드리는 대신에 드리는 대속물이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자신을 주께도 드리고(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의미함), 사도들에게도 드렸다. 단, 이 연보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특별헌금에 해당하는 셈이다. 항상 이렇게 헌금하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선교지를 나누어 맡을 때(갈 2:7-9) 사도들이 이방인 교회에 요청한 것이다(갈 2:10). 5. ‘은혜’는 무엇이며 ‘성도 섬기는 일’은 무엇인가? 아마도 같은 것, 즉 연보: 연보를 하게 해달라고 구했다니? 제대로 배운 성도들이었다! 번역을 ‘성도를 섬기는 은혜와 교제(=참여케)를 간절히 구하니’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구제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통한 성도간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겼다. 6. 마게도냐 성도들은 헌금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했단다(4). 그냥 하면 되지 구하긴 뭘 구해? 헌금도 허락을 받고 하나? 마게도냐 성도들이 자원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는 영광을 내게도 주세요!’라는 식으로. 7. 고린도 성도들이 헌금을 많이 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한 방법이나 권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마게도냐 성도들의 예, 믿음의 풍성함을 칭찬(7), 강제가 아닌 부탁(8, 10), 예수의 모범을 따르라 권함(9), 너희가 먼저 시작했잖아(10)?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13-15) 8. 사도 바울이 헌금을 많이 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고했는데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그대로 따라하라고 가르치면 안된다. 무슨 차이 때문인가? 믿음의 분량도 다르고 인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힘을 다해서 도와야 한다는 명분이 뚜렸했다. 반면에 오늘 한국 교회에서는 명분도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많은 헌금을 강요하고 있다는 인식(모여라, 돈내라, 집 짓자)이 퍼져 있다. 이런 때는 오히려 자제하는 것이 전도를 위해서도 유익하다. 9.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헌금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라. 10.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7)을 다른 말로 하면? 풍성한 믿음?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헌금을 통해서 나타내라는 말이다. 이건 완전히 강제가 아닌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강제다! 이런 정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이라는 증명이 되는 셈이다(8). 강제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 11. 다른 이들의 간절함이란? 위에서 예를 들었던 마게도냐 성도들의 풍성한 헌금: 마게도냐 성도들이 잣대가 된 셈이다. 비슷하게라도 해야 너희도 진실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거 협박 아냐?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12. 강요하다시피 헌금을 하라고 해도 그것이 전혀 강요가 아닌 이유가 무엇인가? 부요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9): 그런 은혜를 받은 자가 어려움에 빠진 성도를 돕는 정도는 오히려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마게도냐 성도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도 잘 하는 일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이다. 13. 연보를 하라고 당연히 명할 수 있는 일임에도 ‘뜻만 보인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정당한 명령이라도 반발하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행하기를 바란다면 이런 식의 정중한 발언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여기서 유익이 헌금에 대한 유익인지 자신의 이런 발언에 대한 유익인지는 분명치 않다. 11절 말미의 ‘있는 대로 하라’는 말도 억지로 하지 말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이다. 14. 12절에 따르면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마음이 먼저: 마음에 없는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15.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이 말이 법적으로나 생존경쟁 차원에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신앙공동체에서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평균케함(13-14):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는 것이 바른 자세다. 인간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 면이 너무나 많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대단히 위험한 제도다. 아예 일을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자세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평균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6. 누구는 남아돌고 누구는 모자라는 일이 성도간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란 것을 무슨 근거로 설명하는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15): 출 16:13-36의 내용을 근거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음을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는 광야생활에서는 내일 먹을 것을 따로 저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욕심부리는 사람의 만나는 썩어 냄새가 났다. 우리 말에 ‘아끼다 똥된다’는 말이 딱이다. 오늘날의 삶이 똑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헤아릴 필요는 있다. 17. 사도 바울이 하필이면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과 같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16-17):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바울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딸려보낸 한 형제에게도 그런 간절함이 있었다 18. 헌금 문제를 조심해서 다루도록 몇 사람을 더 추가해서 고린도 교회로 보냈는가? 두 사람(18, 22): 한 사람은 저와 함께 한 형제고, 또 한 사람은 우리의 한 형제라고 하는데 누군지 알 수는 없다. 돈 문제는 한 사람이 다루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다루게 하는 것이 옳다. 돈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워낙 민감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후일에 모금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는 각 교회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직접 헌금을 가지고 동행하게 했으므로 일행이 무척 많았다(행 20:4). 19. 디도와 함께 간 형제는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한다. 요즈음 말로 쉽게 설명하면? 여러 교회가 추천한 회계사: 동시에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이기도 하다. 전도를 잘 해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라는 말이다. 전도를 잘 하는 회계사? 교회 일이라고 해서 성경만 잘 알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일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은사가 필요하다. 20. 누가 봐도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것보다 더 나은 태도를 바울에게서 배운다면? 선한 일에 조심하는 것(21):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연한 일이지만 동의를 구하고, 협조적인 자세로 손을 내미는 것이 때로는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 대부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돈은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돈이 많이 있으면 훼방을 당하기 쉽다. 잃어버리거나 도둑을 맞을 위험도 있지만 사리사욕을 위한다는 비난을 받기 일도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한 일에 조심하려했다.
바울은 하나님 앞은 물론이고 사람 앞에서도 조심했다(21):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만, 사람들에게도 거리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 사람들을 인도, 혹은 전도해야 할 입장이라면 더 더욱 그렇다. 22. 바울이 디도 일행을 소개하는 말을 보면 누구를 더 높이고 있는가(23)? 외견상으로 형제들: 디도는 나의 동무, 나의 동역자라고 하면서 딸려보낸 형제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란다. 디도는 바울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다른 형제들은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소개하고 있으니 이들이 더 중요한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이들이 각 교회의 대표라는 뜻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고, 반면에 디도는 바울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23. 고린도 교회는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세워야 한다. 누구의 체면을 세우라고 권하는가? 고린도 교회와 우리: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보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린도 교회를 많이 자랑했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서 자랑한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헌금을 하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를 감당하라고 해야지 이렇게 개인적인 사정까지 들먹여도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