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장 |
쉽게 무너지는 것(=장막), 손으로 지은 것, 일시적인 것: 장막은 줄 몇 개 풀고 지지대 몇 개만 빼면 순식간에 넘어진다. 반면에 하늘에 있는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영원한 것이다.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차이다. 0과 ∞의 차이다. 사람의 가치가 육체에 있다면 너무나 허무하다. 의사가 보기에 수술받으러 들어가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인격이 제외된 육체는 그냥 살덩이일 뿐이다. 신혼 여행 때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겼는데 분실되면 같은 크기의 새 필름으로 교환해준다. 그게 말이 되는가? 필름이라고 같은 필름이 아니듯이 집이라고 다 같은 집이 아니다. 책이나 옷이 무게로 값을 매겨지게 됐다면 얼마나 허무한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으므로 하늘에 있는 집을 사모해야한다. 필요하다면 땅의 집을 버리고서라도 하늘의 집을 사모해야 한다. 2. 육체는 언젠가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벧후 1:13-14)이 아닌가? 그런데 왜 벗어버리지 않고 덧입는다고 하는가(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의 모습(눅 24:36-43)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 부활하신 후에도 분명히 육체가 있었다. 그럼에도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장래에 성도는 더 나은 육체를 입는 것이 틀림없다! 육체를 지닌 영적인 존재라는 말인데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쩌랴? 성경이 그렇다는 것을! 그 날이 되기까지는 우리의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탄식할 수밖에 없도록 하겠지만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한다. 3. 어떤 목사님은 주무실 때에도 정장을 하고 주무셨단다. 어느 때에 주님께서 오시든지 바로 마중갈 수 있도록 그랬단다. 속옷바람으로 자고 있는데 주님께서 부르시면 어떡하지? 우리가 입고 있어야 할 옷은 정장이나 속옷이 아니다: 그런 옷은 사람에게나 차려야 할 예의지 하나님 앞에서는 입으나 입지 않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가 단장해야 할 옷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2). 그것이 아니면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벗은 몸이다(3). 초대를 받았음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쫓겨났다(마 22:12-13). 그게 무슨 옷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설명도 필요없었던 모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얀 옷!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4.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어떻게 되나? 영원히 산다: ‘생명이 죽을 것에게 삼켜지면 죽는 것’과 반대현상인데 우리의 상상이나 체험을 뛰어넘는 일이라서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는 영원한 것인데 이것을 덧입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영원한 생명은 자신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생명체도 영원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셈이다. 5.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많은 것을 제약하고 있다. 조금 추워도 안되고, 조금 배고파도 안되고, 조금만 피곤해도 못 견딘다. 이렇게 거추장스런 육체의 제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수밖에 없다(2, 4):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여러가지 제약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저항없이 육체가 요구하는 대로 순응한다면 짐승이다. 벗어버리고 싶지만 벗어버릴 수 없기에 탄식하며 육체의 요구를 길들여 가면서 하늘의 처소를 덧입기를 소망해야 한다. 6. 육체에 거한다는 것은 주와 함께 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담대해야(6) 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살아서 확인할 수 있어야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데... 믿음으로(7):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이루시리라는 것을 아는 방법은 믿음 뿐이다.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이것을 믿게하시는 일이다. 참으로 쉬운 방법이면서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믿는 성도에게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어려운 방법이다. 7. 원래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범죄한 이후 육체 속에 갇혀버렸다. 이 육체를 입은 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몸에 거하는 것은 주와 따로 거하는 것이다(6). 육체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빨리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야 하나(8)?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육체를 잘 보존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기 위해서 때로는 육체를 훈련시켜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다(9, 빌 1:23). 8. 살아야 할 이유도 있고 죽으면 죽는대로 유익이 있으니 어떡하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9): 이것이 생애 최대의 목표가 된 바울의 삶을 보라.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10).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바울에게 이 심판대는 상을 주시는 시상식장이었던 셈이다. 9. 심판대 앞에 서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상급을) 받을 것(10)이란 것은 행함이 중요하다는 말 아닌가?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믿는 성도들을 향하여 권면하고 있으므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어떤 집을 짓느냐에 따라 상급이 다르다(고전 3:10-15)고 말한 것을 참고하자.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다. 10.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시듯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11). 그들이 자신을 알아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을 알아주기를 바라는가?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자랑할 수 있기(=제대로 답변할 수 있기)를 바라서: 마음이 아닌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12)이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자신들을 자랑하는 그들에게 거꾸로 바울을 자랑할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다. ‘바울이 미쳤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라는 셈이다(13). 11.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미친 사람처럼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14). 바울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사랑(14):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셈이고, 그리스도가 다시 산 것은 모든 사람이 다시 산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만이 진정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은 감격을 노래하는 것이다(15). 강압적인 규제나 헌신은 기쁨이 없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사랑의 강권은 자발적이요, 기쁨이 넘친다. 바울의 기쁨에 넘친 헌신적인 삶이 바로 이 사랑의 강권 때문이었다. 12. 이제부터(16)? 언제를 가리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깨달은 때(15)부터: 그 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조차 제자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실망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달은 이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하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이 단순한 한 인간의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깨우침인가! 13. 예수께서 고향에 들렀을 때 고향 사람들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배척했다(막 6:3).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사람들의 잘못이 무엇인가? 예수를 육체대로만 안 것: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에게 예수는 진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체를 입은 인간 예수가 아니라 그 분이 진정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자신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어떤 피조물인가? 하나님과 화목하게된 자: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죄를 대신하게 하셔서(21)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19).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받았다. 15. 친구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서먹서먹해졌다면 화해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임금님과 신하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갈라섰다면 어떻게 화목하게 될 수 있을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다시 화목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친구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방법이나 여러 사람이 중재에 나설 수도 있지만 임금님과 신하 사이에서는 방법이나 중재자가 많지 않다. 화목케하려는 신하의 노력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시고 중재자가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중재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고 한다(18). 16. 죄를 알지도 못한 자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엄청난 신분추락이다. 4성장군을 이등병으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얻으신 것이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시는 것: 죄인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셨다는 말이다. 엄청난 추락이요, 엄청난 상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