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장 |
하나님의 긍휼(자비)하심을 입었기 때문: ‘이러하므로’는 낙심치 않는 이유가 앞장의 결과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새 언약의 일군으로 세워진 것이 영광이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다가 예수님에게서 친히 사도로 세워진 바울은 이 직분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겼을까? 평생토록 낙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작심삼일? 바울에게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2. 천거서가 없다고 비난한 대적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스스로 천거하노라: 자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숨길만한 부끄러운 일도 없고 궤휼(간교함)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도 않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음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천거서 문제를 일단 매듭짓는 셈이다. 3. 바울이 전한 복음이나 바울이 사도란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는 셈인가(3, 4)? 망할 자들이기 때문에 가리워진 것: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분명한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며 증거를 보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막 3:29). 바울의 사도됨을 끝내 거부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다. 4. 귀신은 영적인 존재로서 막강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 귀신이 우리를 덮으면 곤란하잖아? 귀신은 대단한 능력을 지녔지만 성도들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오직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만 영향력을 끼친다. 하나님의 품으로 뛰어 들어온 성도에게는 어쩔 수 없다. 그리스도가 태양이라면 이 세상 신은 구름이다. 구름이 아무리 용을 써도 태양을 다 가릴 수는 없다. 그러니 빨리, 제대로 믿는 것이 상책이다. 5.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아이콘) 아닌가(4)? 우리는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는 깨어진 형상의 조각일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도는 회복되어야할 존재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서 존귀하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표현이다. 이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존귀하다(롬 14:15, 고전 8:11)는 것이 더 정확하다. 6. 바울은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는 문제로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사도가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색하기 짝이 없으나 사도의 직분이 연약한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말이다: 목사나 장로는? 당연히 섬기는 직분이다. 성도들에게 종노릇해야 한다. 간혹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지 성도의 종이냐고 하는 분도 더러 계시는 모양이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히 ‘너희의 종’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으므로!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빛을 비추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다는데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그 영광스러움을 알게 하셨다. 언제 ‘빛이 비추라’고 하셨는가? 천지창조 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1:3).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바울에게 비친 빛(행 9:3)은 훨씬 더 강렬한 것이었다. 무지한 가운데서 정신을 차리게해준 빛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천지를 창조하시던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제2의 창조 사역이다. 캄캄하던 곳에 한 줄기 희미한 빛이라도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데 가장 밝고 밝은 빛이 비친 셈이다. 야곱이 하나님께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면...’ 했다가(창 28:20) 거부가 되어 돌아오는 것에 비교하면 되겠다. 8. 보석함에 보배가 들어 있으면 당연하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으면 잘못 담긴 것이다. 질그릇이 영롱한 빛을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질그릇같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담겼다. 누구의 실수인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능력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신 하나님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돼지 우리에 진주가 떨어져 있다면 돼지가 흘린 것이 아니다. 돼지가 어디서 물어다 놓은 것도 아니다. 9.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지 8-9절을 요약해보자? 외양은 같으나 실상이 다르다: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같으나 견디는 힘이 다르다. 결코 좌절하지 않으며 굴복당하지 않는다. 어려움을 쉽게 이긴다.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즙을 짜기 위해서 포도를 짓누른다는 뜻이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은 군대가 적에게 둘러 싸인 상태를 가리킨다. 10. 그리스도인은 죽은 예수를 짊어지고 다니는 셈이다. 그 분이 왜 죽어야 했는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생명의 움이 돋는다(10, 11): 예수께서 죽으심을 기억하며 온갖 어려움을 견디는 자(죽음에 넘기운 자, 11)에게는 새 생명이 돋아난다. 11. 깡패였다가 목사가 된 김익두 목사 그랬단다, ‘예수는 내가 믿고 덕은 네가 본다.’ 이와 흡사한 표현이 본문에 있다면?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우리가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이김으로 결과적으로 너희가 산다는 말이다.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그런 고통을 겪었다는 말이다. 1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죽어야 한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기 때문(14). 13. 믿으니까 하는 말인데(13)?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시 116 편을 다 읽어보아야겠다. 무슨 의미로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일까?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고 그 구원을 인하여 감격을 누린다. 바로 그 상황이 바울 자신의 상황과 닮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이다. 14. 어떤 교회의 할머니 방에 시 94:14-15절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라는 구절이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결실’까지는 곤란하겠다면서 웃었다. 그보다 더 좋은 구절이 없을까? 16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5. 환난을 잘 참고 견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환난의 크기보다는 장차 받을 복이 훨씬 더 크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당한 고난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1:8). 그러나 장차 받을 복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