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2장 |
죽기보다 싫은 일이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를 선전해야(=자랑해야) 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목사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모든 억울함을 다 뒤집어 쓰고 예수님처럼 말없이 비난을 다 뒤집어 쓴 분들도 있더라. 말없이 기다릴 수 없어서 해명을 해야하고 설명을 한다는 것도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바울의 자랑은 이런 측면이 강하다. 거짓 사도들의 겉만 번지르르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철없는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이렇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2. 자랑하는 내용이 왜 무익한 걸까? 우리가 보기에는 은혜로운 것 같은데... 개인적인 체험이나 경험(=인간적인 요인)이 복음 전파에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체험이 복음을 전하는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야 정상인데 지금은 이것이 도움이 되는 상황이다. 비극이다. 전도자가 인물이 좋고, 학벌도 좋고, 돈도 넉넉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얼마나 효과적일까? 이건 우리 생각이고, 바울은 이런 것들을 일부러 배설물처럼 버린 사람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으로 사역하기를 원하는데 지금은 이런 것을 동원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부득불 자랑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약한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엉터리 사도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된 성도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 3. 부득불 자랑한다는 것은 자랑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정말 자랑할 마음이 없다는 증거가 본문에 있다면 무엇일까? 놀라운 환상과 계시를 보았지만 그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한다. 실제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도 않았다. 4. 간증하는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 일(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니까 하는 것이지 스스로는(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다. 5. 천국에 갔다 온 사람들은 어떨까? 자랑이 하고 싶어서 못 견딜 것이다. 자랑은 아니라도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적어도 14년 동안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계시를 본 사도 요한은 ‘~와 같더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겠다면서도 구체적으로 자랑하지 않았다. 조금 시작하다가 말았다. 6. 천국을 보고서도 14년 동안 어떻게 말하지 않고 견뎠을까? 해서는 안 될 말(=말할 수 없는 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가히 이르지 못할 말) 도 있었기 때문(4): 말을 해도 믿어줄 사람이 전혀 없을만큼 놀라운 곳 아닐까? 7. 바울이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본 것은 자랑할만한 것일까? 진짜 자랑거리다: 5절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라는 말을 의역하면 ‘이 정도돼야 제대로 자랑거리가 되겠으나’라고 할 수 있다. 자랑을 하려면 제대로 할 수 있는 자랑거리라는 말이다. 8. 바울은 무엇이 두려워서 자신이 본 것조차 자랑하지 않겠다고 하는가? 사람들이 바울을 과대 포장하는 것(6): 이런 자랑거리가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그런 내용으로 간증집회를 열었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왔을까? 그런데 왜 입을 다물고 약한 것만 자랑하려고 하는가? 이런 체험이 없는 성도들이 시험에 빠질까 염려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체험이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 아닐까? 최종권위는 말씀이어야지 어느 누구의 체험이나 계시가 우선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베드로가 환상을 세번이나 보고서도 말씀에 근거하여 그 의미를 깨달았다(행 11:16). 9. 바울이 굳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지기 때문(9): 그런 약한 것이 없다면 스스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음을 알고 하는 말이다. 10. 바울의 말(7-9)을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자기 몸에 가시(사단의 사자)가 있음을 감사할 수 있을까? 큰 은혜를 받은 자(=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11절의 사도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은 자): 죽을 목숨을 살려줬다면 나머지 일들이야 애들 말로 껌값 아니겠는가! 11.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사례로 이 본문이 잘 쓰이는 것 같다. 어떻게 위대한 바울의 기도를 세 번이나 들어주시지 않는가? 잘 들어주셨다: 바울의 원대로 되는 것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하시는 것이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가 응답된 것이란 생각은 너무나 어린 생각이다. 기도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름을 깨닫는 것과 깨달은 것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기도다. 12. 바울을 몹씨 괴롭힌 이 사단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럴만한 사건이나 말씀이 있는가 생각해보자. 약한 시력, 안질: 예수님을 만날 때 강한 빛에 쪼여 사흘이나 앞을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다(갈 4:15)는 말에서 추측할 뿐이다. 그 외에 못생긴 외모, 간질 등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것도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3. 사단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그것 때문에 몹씨 고통을 당했다. 그 고통을 없애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바울의 시각은 어떻게 다른가? 바울은 그 가시를 보고, 하나님은 베풀어주신 은혜를 본다: 고통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만 보고 있으면 계속 고통스럽다. 시각을 돌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피부가 몹씨 가려우면 물파스를 바른다. 물파스의 화끈거림 때문에 가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도 있고 은혜의 감격도 있을 때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통스러운 삶을 살건지 감격스런 삶을 살 것인지 결정된다. 삶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시각을 바꾸는 일이 훨씬 쉽다. 14. 억지로 시킨다고 하나? 그런다고 칭찬을 받아야겠다(11)? 칭찬을 받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영역본 참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자랑을 했으니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 아니냐는 것이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난할 때 고린도 성도들이 마땅히 바울을 변호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책망이다. 15.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도성을 자랑하듯이 추천서를 내밀었으며 환상과 계시를 자랑했다. 반면에 바울이 내세운 사도된 첫 번째 증거(=표)는 무엇인가? 참음: 무슨 일에 얼마나 참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까? 그럴만큼 참았다는 말 아니겠는가?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분이니 얼마나 참았을까? 교회의 일군이라면 제일 먼저 참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이라는 의미인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신학교 가기 전에 참는 법부터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참는 것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도의 표이다. 16.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무슨 공평치 못한 짓을 했는가? 폐를 끼치지 아니한 것: 다른 교회에는 폐를 좀 끼쳤는데 고린도 교회에는 폐를 끼치지 않아서 미안하다? 재물을 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요구하거나 바라지도 않았음을 염두에 둔 표현같다. 스승의 날 선물 가져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선생님이 선물을 가져오지 못하게 했더니 뜻밖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진심으로 선물을 준비한 학생들이 상처를 받더라는 것이다. 진심어린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는 것도 하루 이틀 만에 습득하기가 쉽지않은 기술이다. 식사대접하겠다는 것을 잘못 거절하면 크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 혹시 이런 식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어서 사과하는 걸? 아무래도 그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 같다. 17. 좋은 선물을 사오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연인에게 바울의 표현을 빌려서 한 마디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14): 바울이 연애를 했더라면 정말 잘 했을 것이다. 성도들을 향하여 어떻게 이런 진한 표현을 다 쓰는가? 아마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연애감정 이상을 느꼈으리라. 월급이 적어서 미안해 하는 남편에게 ‘누구는 매달 얼마를 가져오던데’ 하며 긁어대는 부인과 ‘내게 소중한 것은 월급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부인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18. 바울이 언제 고린도를 방문했기에 이번에 가면 세번째인가?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 들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이 첫번째고, 에베소에 머물며 말씀을 가르치는 중에(아마도 3차 전도여행 중) 잠간 다녀온 것이 두번 째다. 이른바 ‘가슴 아픈 방문’이었다. 19. 바울이 성도들의 재물을 탐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대적자들도 부인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비난하는가?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16): 사기를 쳤다는 말이다. 직접 사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보내라고 하고는 착복하려고 한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돌았을 가능성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 헐뜯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모금한 헌금을 각 교회의 대표들이 직접 지참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했다. 20. 지금까지 자랑도 하고, 야단도 친 것이 변명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변명하는 것과 덕을 세우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 변명은 나를 위한 것이고, 덕을 세우는 것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때로는 변명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는 노력이다. 21.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보기를 원하는 ‘나의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너희의 원치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얘기를 했는데... 나의 원하는 것: 거짓 사도들을 배척하고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바로 서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