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0장 |
바울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바울’이라는 표현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바울을 비난하는 대적자들의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 ...담대하다고 하는 나 바울은...’이라고 번역하였다. 정말 그러한지 시험해보겠느냐는 협박(?)성 발언이다. 나로 하여금 이런 태도로 여러분들을 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2. 바울은 본래 그렇게 온유하거나 약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이 화를 내면 무섭다. 그리스도인들을 진멸하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생각해보라. 화를 낼 때가 되면 낸다(=담대히 대하려는 것, 2절)!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험한 말을 하는 셈인가?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2):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세상적인 이기심이나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예수를 팔고다니는 인간이라고 악의적인 말을 퍼뜨리는 대적자들을 가리킨다. 3.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선 것이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 모든 어려움을 헤쳐가는 것을 보아도 바울은 절대로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겸비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고린도 성도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1) 대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 성질을 다 죽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적대자들이 오해한 모양인데 고린도 성도들도 그런 주장에 동조해버린 모양이다. 4.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힘을 쓰지 않고 머리를 써서 간단하게 이기는 것을 보면 허무하다. 게임이 너무 싱겁게 끝나기 때문이다. 육체를 가진 자가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이기려면 무슨 무기를 동원해야 할까? 영력: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4)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리 견고한 진지라도 깨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무기라는 뜻이다. ‘육체의 힘’이란 인간적인 동기로 인간적인 수단을 쓰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런 인간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온유와 관용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힘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여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5.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로 싸워야 하는 상대는 무엇인가? 하나님 없는 모든 이론, 지식, 교만, 생각 등등: 인간의 교만함(=높아진 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전부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다. 반면에 대적자들은? 6. 고린도 성도들이 온전하게 바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사도의 권위로 혼을 내서, 빨리 해결하지 않고 뭘 기다리나? 고린도 성도들이 온전하게 바울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더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은 벌할 것이다. 디도가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모든 일이 회복되고 끝난 것 아니던가? 일부의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7.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이 어떤 자들의 외모에 현혹되어(5:12)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의 어떤 외모에 현혹되었을지 다음 구절들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3:1, 11:6, 11:20-21, 12:1-7) 3:1: 천거서, 11:6: 화려한 말솜씨, 11:20-21: 담대한 태도, 12:1-7: 환상과 신비 체험: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내용물에 문제가 전혀 없을 때의 얘기다. 보기만 좋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색소, 방부제, 화학조미료, 각종 첨가제로 무장한 음식이 보기 좋다고 자기 집의 수수하지만 조심스럽게 장만한 음식을 무시한다면? 조금은 권위있는 듯 강압적이어야 하고 큰 소리(뻥)를 쳐야 하고 허세를 부려야 설교답다고 여기는 것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8. 만약 어떤 사람이 고린도 성도들 앞에서 자기야 말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아마도 사도의 자격에 관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말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하라고 하는가(7)? 결과적으로 자기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교회를 혼란에 빠트렸을까? 이단? 꼴통 유대주의자들? 바울의 사역을 끝까지 반대하고, 방해한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겠다. 문제는 어떠한 말로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잘 가르쳐놓는 수밖에 없었겠다. 9. 바울이 자랑을 많이 한 사람은 아니다. 여기서는 무슨 자랑을 얼마나 하려고 ‘지나치게 자랑하여도’라고 하는 걸까? 무엇에 관한 자랑일까?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용 자랑(아마도 11-12장): 아무리 많은 자랑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권위를 분명하게 세움으로 결과적으로 ‘너희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말로만 공갈을 치지 막상 대하면 꼼짝도 못한다. 편지만 힘이 있지 사실은 별 볼일 없으니 걱정마라’는 말을 했던 모양이다(10). 그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9, 11)? 9절: 편지로만 놀라게 한다고 생각지 말라,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다. 11. 바울은 감히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비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자기가 자랑하는 것은 어떻게 되나? 그들도 자랑을 하고 바울도 자랑을 하는 것 같은데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자랑을 했지만 바울은 그런 기준을 오래 전에 버렸다(고전 2:1-5).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자랑한다. 바울의 자랑은 자신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부득이 하는 자랑이다(12:1, 무익하나마, 부득불). 12. 바울도 자랑하기는 하는데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13-16)? 분량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분량’, ‘한계’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자랑의 정도와 선교의 영역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자랑을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선교를 하더라도 정해진 영역이 있는데 바울은 이것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13. 바울의 선교영역은 이방인이다(행 9:15, 갈 2:9). 아마도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비난하고 헐뜯은 자들은 이 영역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생각해보면 이들이 어떤 자들인가? 유대인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선교영역의) 한계를 넘어서 남의 구역에 들어와서 남의 수고를 가로채는 분량 이상의 짓을 하는 셈이다. 14. 바울이 더 위대한 사도가 되어 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이(한계가) 더 넓어져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더함에 따라(15):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는 말은 성도들의 믿음이 더함에 따라 우리의 한계도 더하여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와 서바나를 가리키는 말이며(행 19:21, 롬 15:22-24) 아무도 복음을 전하지 않은 곳이다. 15. 자랑하고 싶더라도 한계를 지키면서 하라는 것이다. 그 한계는 무엇인가? 주 안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성도의 자랑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섭리, 등이다. 그렇게 자랑함으로 결국은 주께 칭찬을 받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