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5장


1. 유월절을 지키던 첫째 달 열넷째 날이 본래는 무슨 날이었던가?

    출애굽 D-1 Day: ‘출애굽 전날 밤’이라고 하면 어딘지 긴장감이 떨어지는 듯하다. 이럴 땐 군대용어가 더 실감이 난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던 날, 이스라엘은 양의 피로 죽음을 면한 날이다. 그게 유월절의 유래다.

2. 거룩한 궤를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어깨에 메지 말라는 것은(3) 궤를 어깨에 메고 옮겨 왔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 전에는 궤를 다른 곳에 옮겨져 있었다는 말인데?

    므낫세나 아몬의 시절에 법궤마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던 것 아닐까? 일반적으로 언약궤는 유다가 멸망당할 때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군가가 감추었다는 말이다. 얼마 후의 일이다. 그와 비슷한 일이 이전에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3. 요시야가 아무리 선한 왕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규정을 함부로 고칠 수 있나?

    고쳤다기보다는 직분의 발전이라고 해야겠다: 이제는 메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것은 폐지라기보다는 발전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대학을 마친 사람이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4. 상황이 변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요시야의 명령은 이전과 다른 점이 더러 보인다. 궤를 메지 말라는 것 외에도 유월절 규정이 조금 달라 보이는 점이 무엇인가?

    유월절 양을 레위인들이 잡은 것(6): 각 가정에서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모임을 통해서 지키려다보니 레위인들이 양을 잡은 것 아닐까? (참고, 30:16-18)

5. 모세의 글이라면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다윗의 글과 솔로몬의 글은(4) 뭘까? 시편?

    여기서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직무와 관련된 규정을 가리키는 것이다(8:14). 이 행사에 레위인들이 가장 바빴다(14).

6. 기꺼이 유월절 제물을 내놓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4부류의 지도자들: 왕이 제일 먼저 냈더니, 방백들도 따르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레위 사람들의 우두머리들도 뒤를 따랐다.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인 셈이다. 그것도 즐거이(8)!

7. 번제물을... 여호와께 드리... 고(12) 나면 불에 굽거나 삶는 유월절 양(13)은 또 뭔가?

    여호와께 드린 것은 기름과 내장이었을 것이다(레 3:9-11): 원래 유월절 양은 남김없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각 가정에서 드리던 유월절 제사가 민족적인 행사가 되면서 화목제와 비슷한 성격으로 변모된 것 같다. 화목제는 기름과 내장은 번제로 드리고 살코기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나누어 먹었다.

8. 유월절 양은 불에 굽고 나머지 성물은 삶았다(13). 나머지 성물은 아마도 염소나 수소일 것이다. 왜 이렇게 구분할까?

    원래 유월절에는 양을 반드시 구워먹었다(출 12:8-9, 신 16:7). 삶은 고기는 바로 이어지는 잔치(무교절)에 쓰인 것 아닐까?

9. 유월절을 지키는 과정에서 레위인들이 가장 바빴던 모양이다. 다른 직무를 맡은 레위의 형제들이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레위인들의 수고 덕분에(14) 노래하는 자나 문지기들도 자신의 직무를 다할 수 있었다(15). 형제들이 바쁘다고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 해서 다른 사람의 직무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각자가 소임을 다 잘 감당함으로 여호와를 온전하게 섬길 수 있었다.

10. 사무엘 이후로 이렇게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고?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도 그랬을까?

    아닌 게 아니라 솔로몬의 경우에는 성전 낙성식을 거창하게 지켰지만 유월절을 지킨 기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다윗 시절에는 성전조차 없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유월절을 지킨 기록만 본다면 참석자의 수나 제물의 수로는 요시야 때에 가장 큰 행사였던 모양이다.

11. 요시야 재위 18년에 이 유월절을 지켰단다. 이 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종교개혁을 마무리 한 해(34:8): 그러니까 이 유월절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하이라이트이자 마무리인 셈이다. 우상을 척결과 성전 수리를 마무리하고 율법책을 발견한 해이다(참고, 왕하 22:8, 23:21-23).

12. 갈그미스가 유브라데 강 가에 있다는데 왜 요시야가 방비하려고 하지?

    갈그미스는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관문으로 쇠약해가던 앗수르의 마지막 보루였다. 바로 강 건너 하란과 대치되는 곳이다. 애굽의 바로가 이곳까지 싸우러 간 것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과 대전을 치르려는 것이다(주전 609-605). 바벨론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앗수르는 패망, 애굽은 이 지역에서 밀려났다. 요시야가 이런 바로를 막으려고 한 것은 친바벨론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북서쪽에 있는 요새로 바로의 군대가 지나가려는 길목이다.

13.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자칭 하나님의 명령: 이스라엘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한 대적이 한 둘이 아니다. 앗수르 왕도 그랬다(사 36:10 = 왕하 18:25 = 대하 35:21). 더구나 느고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한 사람이 아니다. 유다의 멸망에 깊이 관여한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이라고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고레스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감동시킨 적이 있기는 하지만 고레스는 메시야라고 불려지기까지 했을 만큼(사 45:1)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인 왕이다. 느고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14. 요시야는 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요시야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자기의 영내를 통과해서 다른 나라를 치러가겠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스스로 속국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느고에 맞서 싸운 것은 친바벨론 정책을 편 외교적 판단 착오일지는 모르나 통치권자로서 잘못된 일은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마저 하나님께 간절하게 지혜를 구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를 도와주셨더라면 좋았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유다를 징계하시기로 뜻을 정하신지 오래다(대하 34:22-28, 왕하 23:26, 24:3-4). 신앙생활만 잘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 노력하지 않아도? 이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서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슬픈 현실이지만 신흥강대국 바벨론과 전통적인 강대국 애굽이 다투는 사이에서 제대로 국력을 기르지 못한 유다의 현실을 고려했어야 옳다.

15. 요시야 왕의 죽음이 특별히 슬픈 이유를 대하 32:25-26, 34:22-28, 왕하 23:26, 24:3-4절을 참고해서 생각해 보자.

    미루어둔 하나님의 진노를 그래도 요시야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방패막이마저 사라졌다.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끝이다. 요시야의 선함마저 극복할 수 없던 선조들의 악함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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