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4장


1. 8세에 왕이 됐는데 어떻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을까?

    이 표현은 그가 통치한 전 기간을 종합한 표현이다: 어릴 적에는 므낫세와 아몬 시절의 아픔을 하는 이가 후견인으로 있었을 것이다. 왕이 된지 8년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으니 그 전에는 누군가 후견인 노릇을 했겠다.

2. 유다의 왕이 걸을 수 있는 길은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다윗의 길(2)이다. 다른 하나는?

    여로보암의 길(왕상 16:2): 다윗의 길은 사는 길이요 여로보암의 길은 패망의 길이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어간 왕은 무수하다. 그러나 다윗의 길을 걸은 왕은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뿐이다.

3. 재위 팔년이면 16살인데 하나님을 찾았단다. 그리고 20살(재위 12년,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이 죽던 해)에 우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상을 그냥 제거하면 될텐데... 얼마나 지독한가?

    우상을 제거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다니면서 우상을 모조리 다 찍고, 빻고,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들의 뼈를 불사르기까지 했다. 철저한 개혁이었던 셈이다. 요시야 재위 13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렘 1:2),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을 많이 뒷받침했을 것이다. 스바냐도 동시대 사람이었으니 어떻게든 도왔을 것이다(습 1:1).

4. 요시야가 우상을 숭배하던 제사장들의 뼈를 불사른(5, 왕하 23:16-18) 일은 오래 전에 예언된 것이다. 무슨 일로 이런 예언이 나왔던가?

    여로보암이 분향할 때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외치던 말(왕상 13:1-2): 그런 다음 물도 떡도 먹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거역했다고 억울(?)하게 죽은 선지자의 사건 말이다.

5. 요시야의 개혁이 전국, 도농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시행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은 무엇인가?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였음(6):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중앙부, 시므온은 최남단, 납달리는 북단이니 전국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였다면 온전한 성읍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6. 3-4절과 7절은 중복 아닌가?

    3-4절은 유다지역을 말하는 것 같고 7절은 이미 망해버린 북 이스라엘 지역의 우상을 척결한 것처럼 보인다. 재위 12년에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이 죽었다. 이 틈을 타서 앗수르의 영지였던 옛 북이스라엘 지역을 회복한 모양이다.

7.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데 몇 년 걸렸는가?

    7년: 재위 12년에 시작한 개혁이(3) 18년에 마쳤으니(8) 므낫세나 아몬의 통치를 거치면서 얼마나 우상숭배가 만연했었는지 알만하다.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일이 남았다.

8. 여호와의 전을 수리할 돈은 누가 헌금한 것인가?

    전 국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람들 전체 주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란다(9).

9. 당시에는 헌금을 드리는 방식이 오늘 우리와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누가 헌금을 거두었는가?

    문지기(9): 성전에 들어올 때 거두었으니 헌금이라기보다는 성전세인 셈이다. 하긴 오늘 우리와 같은 방식의 예배가 없었으니!

10. 어느 유다왕이 성전을 헐었는가?

    우상숭배가 극심해도 성전을 헐지는 않았다.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건물이 퇴락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성전을 헌 죄에 해당한다. 므낫세가 통치기간이 50년이 넘는데 제대로 성전을 관리하지 않았으면 들보마저 새로 만들어야 할 상황일 수도 있겠다.

11. 헌금을 꺼낼 때 율법책을 발견했다면(14) 헌금궤 안에 율법책이 숨겨져 있었다는 말인가?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헌금궤와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다(왕하 22:8-10): 가령, 헌금한 돈을 꺼내기 위해서 헌금궤를 엎었을 수도 있는데 그 밑에 있었거나 아니면 내부에 있었거나. 율법책을 이렇게 숨겨야 했던 시절도 있었고 백성들이 헌금을 하지 않아서 헌금궤를 살펴볼 필요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말이다.

12. 율법의 말씀을 듣는데 왜 옷을 찢었을까? 처음 듣는 말씀이었을까?

    말씀을 듣다가 추측컨대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배반하는 경우에 임할 저주의 말씀(가령, 신 28장이나, 레 26장)을 들으면서 이렇게 애통한 것 아닐까? 이런 게 진짜 은혜다.

13.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그래서 물었더니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심판이 지연되기는 하겠지만(28) 피할 수 없다(21, 24-25). 그럼에도 요시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말씀을 준수하도록 인도했다(28-33).

14. 이 시대에 활약했던 선지자는 예레미야나 스바냐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출신(렘 1:1)으로 요즘 말로 촌사람이었다. 스바냐는 왕족 출신이다(습 1:1). 훌다는 왕궁의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였으니 중앙무대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선지자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덜 유명했던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더 잘 알까?

    글을 남겨야 후대에 유명해진다. 글을 남긴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위대한 일을 하고도 그것을 소개하는 글을 남기지 못하면 명성이 짧다.

15. 왕을 가리켜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나?

    이런 어투가 선지자적인 어투일지도 모르겠다: 선지자가 왕의 신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구별된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한 어투가 아닐까? 자신의 이기적인 권위를 내세우려는 사람이 보면 정말 반가워하겠다.

16. 사반이 왕에게 읽어준 율법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24절: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과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은 같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한 부분을 읽어주었다.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신 28:15-68과 레 26:16-19이다.

17.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25절). 결국은 하나이지만.

    1) 하나님을 버리고, 2) 우상을 섬기고, 3) 악을 행함(=손의 모든 소위): 하나님을 버리면 그 다음이야 자명한 길이다.

18. 훌다는 답변을 두 번 한 것 같다. 24-25과 26-28은 각각 누구를 향한 답변인가?

    24-25: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 = 유다의 대표자로서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유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다. 범죄한 주체가 17절에서 보듯이 ‘이 백성’이다.

    26-28: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 = 개인으로서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상이 ‘네, 너’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돌이키시지는 않지만 요시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특별히 따로 개인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19. 요시야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갈 것이란다. 전쟁터에서 죽었는데(35:22-25)?

    늙어서 죽으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꼴을 보거나 당하지는 않으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노가 쏟아지는 장면을 보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20. 요시야는 지금까지 우상들을 타파하고 우상의 흔적을 지우고 성전을 개축하는 일을 해왔다. 그만하면 종교개혁을 다 이룬 것 아닐까?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30-32):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그 말씀을 대로 살도록 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다.

21. 요시야가 말씀을 들을 때 옷을 찢게 만든 부분은 분명히 회개와 저주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한 발짝 더 전진하려면 어떤 말씀이 필요한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행하는 것(31): 신명기 말씀이네(신 6:5, 4:1-8)!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는 것에 비하면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나 성전을 수리하는 것은 그냥 준비과정에 불과하다(가볍게 여기자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회개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회개는 방향을 돌리는 것일 뿐 방향을 틀었으면 그 방향으로 전진해야지! 아쉽지만 요시야가 이 일에 더 헌신해야 했다. 진정한 개혁은 말씀에서 시작해서 말씀으로 추진력을 얻어야 한다.

22. 30절과 32절은 공개적인 행사다. 그러면 31절은 개인적인 일일까?

    공개적인 행사다: 왕이 자기 처소에 섰다는 말이 약간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왕이 서야 할 자리, 연단 같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왕하 23:3).

23. 요시야가 사는 날에(33) 백성이 여호와께 복종하였더라! 좋은 말인가?

    좋은 말이지만 안타깝다: 왜 그가 죽은 후에는 백성들이 변해야 하는가? 죽은 후에도 신앙적인 행위가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수 24:31),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삿 2:18),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삿 8:28),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삼상 7:13),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왕상 4:25),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대한 24:2), 스가랴가 사는 날에(대하 26:5), ... 다음 세대에 신앙이 제대로 전수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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