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8장


1. 웃시야와 요담이 비록 불안정하나 선한 왕으로 불리면서 나라의 기틀을 간신히 세웠다. 그런데 아하스가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불안한 조짐이다. 결국 무슨 일이 터지는가?

    온갖 이민족의 침입: 이민족의 침입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여하에 달렸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한데 이게 그렇게 어려울까?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앞날이 오늘의 신앙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2. 유다의 왕은 다윗의 길로 행하는 것이 정상인데 아하스는 누구의 길로 행하였다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길일까?

    이스라엘 왕들의 길, 여로보암의 길(왕상 15:34)이요, 아합의 길(왕하 8:27)이다: 아하스가 왜 배우지도 않은 먼 곳의 길을 걷는지 내 참! 필경은 멸망의 길이란 것을 몰랐을까? 여로보암의 집이나 아합의 집이 결국은 멸족되고 만 것을 정말 몰랐을까?

3. 우상을 섬기되 한두 가지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온갖 우상을 다 섬긴 모양이다. 그 중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는 것’은 무슨 우상을 섬긴 것일까?

    몰렉: 어린 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던 이교의 우상이다. 레 18:21, 20:2-5에서 금한 것이다. 아하스는 되먹지도 않은 종교자유화 정책을 편 걸까?

4. 하루에 군사가 12만이 죽고 왕자와 내무장관과 총리가 죽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면 전쟁은 끝이 난 것 아닌가? 왕은 어디서 무얼 하는가? 왕하 16장에서 답을 찾아보자.

    예루살렘에서 문을 닫아걸고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예루살렘만 제외한 전국이 초토화된 셈이다. 왕의 아들 마아세야는 아하스의 아들이 될 수는 없다. 아하스가 20세 즉위했고 즉위 초에 일어난 전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왕족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인가, 유다를 위한 선지자인가?

    선지자는 어디에 있든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다.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더라도 북이스라엘의 잘못이 있으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대적(유다)을 이롭게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이 선지자의 임무다.

6. 이스라엘의 승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가?

    예컨대 ‘동생을 손 좀 보랬더니 아예 죽여 놨다. 그러면 너도 죽어봐라?’: 훗날 앗수르도(사 10:5-12) 에돔도(옵 1:11-16) 이런 식의 징계를 받는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7.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지 쉬운 말로 바꾸어 보자.

    너희도 행한 대로 한번 따져볼까?

8.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세운 때부터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기에 바빴다. 간간히 선지자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우상을 섬기며 쿠데타로 날을 지새던 에브라임 땅에도 진실된 성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뎃 선지자와 에브라임 자손의 우두머리 몇 사람(12)과 이들의 말을 순종하는 사람들(14):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싶었는데 선지자도 있고 선지자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상만 섬기는 사회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정말 귀한 사람들이다. 수십, 수백년 동안 공산당, 혹은 우상이 지배하던 북한 땅에도, 중국 땅에도, 심지어 이집트에서도 신앙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얼마나 놀랐던가!

9. 역대기의 초기 독자들은 대부분 유다 출신들이다. 그러면 그들이 듣기에 좀 거북한 부분이 무엇일까?

    유다가 불순종하여 징계를 당하는 판에 에브라임이 주축이 된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순종하였다고 하는 점: 에브라임 출신이라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동참할 명분을 주는 셈이다.

10.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을 도로 먹이고 고쳐서 되돌려준 이런 예가 또 있을까?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엘리사의 경우) 일반 전쟁사에는 결코 없는 일이다.

11. 동족인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에돔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마저 유다를 쳐서 뜯어먹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아하스는 애석하게도 앗수르를 찾는다.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자칫하면 더 큰 화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12. 블레셋 사람들이 차지한 지명에는 어떤 익숙한 지명이 보이는가?

    벧세메스: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온 곳이다.
    아얄론: 여호수아가 대적과 싸울 때 달이 머물렀던 골짜기다.
    딤나: 삼손이 불장난 하던 곳(삿 14, 15장).
    종합하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마주하면서 뺏고 뺏기던 땅이다. 아하스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니 블레셋도 에돔도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13. 아하스는 유다 왕인가, 이스라엘 왕인가?

    유다 왕임에도 굳이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것(19)은 그의 악함을 비꼬는 것이다.

14. 어쩌다 매를 맞을 수는 있다. 그럴 때에 중요한 것은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데 매를 든 아버지에게 오히려 대항하고 달려들면 어떻게 되나?

    끝이지: 곤고할 때에 더욱 범죄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구제할 방법이 없다.

15. 아하스가 이렇게 악한 왕이 된 것은 당시에 강대국으로서 세력을 넓혀가던 앗수르를 바라본 탓이다. 그래서 친히 앞장서서 앗수르의 신을 섬기기도 했다. 결과는?

    망했다(23): 성전 문을 닫고 앗수르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까지 앗수르에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노력의 절반이라도 하나님께 하지?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가 이사야다. 아무리 아무리 경고하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을만한 이적을 구한다면 어떤 이적이라도 보여주겠다고 사정해도 듣지 않았다(사 7:11-12). 구하지 않는 아하스에게 억지로 주신 이적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다. 아무리 거절해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선언이다. 아하스는 아버지가 문둥병이 든 채로 뒤에서 잔소리하는 세월을 오래 지내면서 비뚤어진 것 아닐까?

16. 왕하 16장과 본 장을 비교해 보자. 내용은 동일한데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열왕기의 기록은 사건 자체만 기록하는데 반해서 역대기는 사건의 발생 원인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첨가하고 있다. 일종의 신학적 해석을 가한 셈이다. 사실은 이것이 열왕기와 역대기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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