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8장


1.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치는 것은 좋으나 이럴 때 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잘 섬기던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아합 가문과 가까이 하는 것은 비극의 출발점이다. 훗날 아합의 딸 아달랴로 인하여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같은 왕족(등급)이라고 혼인관계를 맺었겠지만 인간적인 눈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았더라면 결코 같은 등급일 수가 없다. 아마 민족의 통일이라는 꿈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혼인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은 훗날 큰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왕하 11:1-3).

2.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하는 대답이 우리 아이들의 표현을 빌리면 어떻게 되나?

    ‘네 것이 내 것이고’의 반대 즉 ‘내 것이 네 것이고’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 이런 말도 되겠다.

3. 여호사밧의 충고에 따라 선지자들을 불렀다. 무엇이 문제인가?

    400명: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데 이렇게 많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다.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숫자다. 사람이 많으면 더 강력한 효과가 있다고? 그럴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진리는 다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4. 400명의 선지자가 한결같이 대답을 해도 다른 선지자를 찾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아합과 가깝게 지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한평생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여호사밧이기에 400명의 선지자가 하는 예언에서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방식과 다른 점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을 이렇게 많은 선지자가 대규모로 전하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5.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가?

    자기 입맛대로 들으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뜻에 맞아야 한다? 거꾸로 된 일이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춰가야 한다.

6. 이렇게 많은 선지자가 활동 하고 있었지만 다 가짜다. 오직 한 사람 미가야는 어떻게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을까?

    모두가 말씀을 버려도 하나님은 꼭 자기 사람을 남기시더라: 이런 남은 자, 그루터기에서 자란 새 싹이 여호와 신앙을 이어갔다. 남은 자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신 하나님 탓이다.

7. 이스라엘에도 내시가 있었나?

    기본적으로 없다: 내시는 왕의 여자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면서 궁궐의 일을 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거세시킨 신하다. 짐승을 이렇게 다루는 것도 금하셨다(레 22:24). 하물며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아합에게 내시가 있었다. 이방의 아내를 데려온 탓이다.

8.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드기야는 왜 철로 뿔을 만들어 와서 말씀을 전하는가?

    일종의 시청각교재다: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펼치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문제는 전하는 메시지가 바른 것이 아니란 점이다. 방법은 좋은데 내용이 틀렸다면 그게 무슨 소용?

9.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는 얼마나 충성스런 신하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왕의 입맛에 좀 맞춰달라고? 왕에게는 충성하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왕을 이롭게 하는 신하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10. 미가야가 좋은 말을 해줘도 말하는 태도를 보면 진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라고 다그친다. 바른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쁘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그런 짓을 않지! 벌받을 짓을 하고 있으니 좋은 말은 조롱이고 진심으로 하는 말은 벌일 수밖에 없다.

11. 목자 없는 양이란 표현(16)은 불쌍한 중에도 불쌍하다는 뜻이다. 미가야의 예언에서는 목자가 없는 것이 오히려 평안하다. 왜 그럴까?

    그만큼 아합왕이 나쁜 목자라는 뜻이다: 양은 목자없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목자가 없는 것이 더 낫단다. 저런 부모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아합이 얼마나 백성들에게도 해를 끼쳤는지 잘 보여준다.

12. 아합 왕이 신(?)이 났다.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17). ‘보세요, 내가 그랬잖아요!’ 이럴 때는 자기 말이 맞는 것보다는 틀리는 것이 낫다. 우리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자.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자기 말대로 일이 잘 안 될 때: 이럴 때 신이 나면 안 된다. 부정적인 말로 일을 방해한 것이지 자기가 똑똑하다고 뻐길 일이 아니다.

13.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한다. 다른 선지자들은 누구의 말을 하는가?

    거짓말하는 영(21): 다른 선지자들도 영감을 받긴 받았네! 하나님께서 허용한 사탄의 영이다. 자신이 받은 영감이 거짓의 영인지, 하나님의 영인지 어떻게 알아?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던 자들에게는 임하는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요일 4:1, 신 13:1-5).

14. 400명의 선지자와 미가야의 말이 다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자고 하고선 그 뜻에 순종했는가?

    아합의 죽음만 예고되었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 그러면 가도 되는 건가? 패배할 것이라는 예언이니까 가지 않았어야 했다. 결국 위험에 빠졌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런 위험한 짓을 하면 안 되는데...?

15. 시드기야는 자신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어떻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 부도덕한 방법으로 자신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16. 시드기야가 골방에 왜 숨어야 할까?

    거짓 예언이 들통나서: 아합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죽어야 할 인간이 시드기야일테니!

17.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이란 먹고 마시는데 힘이 든다는 뜻일까?

    죽지 않을만큼의 양: 지속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는 떡과 물이다. 죽으면 고난도 끝이니 계속해서 고난을 당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다.

18. 이스라엘 왕이 왜 변장하고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 꾀가 많아서 그랬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기는 한데 그렇다면 여호사밧은 바보란 말인가?

    미가야의 예언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행위는 아니다. 누군가가 좋지 않은 말을 하면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호사밧을 설득할 만큼 잘 둘러댔을 것이다. 전군 지휘를 맡긴 것은 아닐까?

19. 아람 왕이 부하들에게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하고만 싸우라고 한 것은 전쟁에서 당연한 일 아닌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자세하게 쓸 이유가 있을까?

    이전에 아람 왕이 당한 적이 있어서(왕상 20:31-34)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부연설명인 셈이다.

20. 아람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동시킨 탓인가, 그들이 아합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왕상 22:32)인가?

    아합이 아닌 것을 알아본 것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다. 결국은 같은 현상을 표면적으로 보느냐 이면을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21. 여호사밧이 무엇이라고 소리를 질렀을까? ‘나는 이스라엘 왕(아합)이 아니야!’ 라고 했을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 수 없다: ‘왕만 공격하라’는 적의 외침을 듣고 ‘나는 이스라엘 왕이 아니야’ 라고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하는 소리를 듣고 아람 지휘관들이 알아차린 것 같다. 그러니까 지휘관들은 아합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전에 당한 적도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2. 여호사밧이 무사히 돌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아람 지휘관들의 지혜 덕분인가?

    아람의 지휘관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과 판단대로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 없는 눈으로 보느냐, 하나님의 섭리을 알면서 보느냐의 차이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되는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인다.

23. 죽을뻔한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하다. 반면에 이스라엘 왕은 어떻게 죽는가? 무심코? 우연히?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죽는다: 예전 성경에는 ‘우연히’ 라고 번역되었다.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미 예고되었던 일이다. 우연이나 필연처럼 보이는 일이라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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