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장


1. 성도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종말로’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가?

    아니다: 여기서 ‘종말로’라는 말은 ‘마지막으로’라는 뜻이다. 편지의 마지막이란 뜻이다.

2.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염려스러웠는데 듣자하니 정말 잘 하고 있단다. 그러면 권면할 게 없잖아? 잘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이 본문에 있다면 무엇인가?

    더 힘쓰라(1, 10): 현재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10).

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도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행하지도 못하는 말씀을 더 알면 양심만 더 졸리잖아? 반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칭찬하는가?

    곧 너희 행하는 바라(1):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은 ‘마땅히 행할 바’이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였다고 칭찬하면서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4. 바울이 명령이라고 하면서 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하라(4): 음란하지 말라. 색욕을 좇지 말라. 이런 문제로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나 남편을 범함으로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3).

5. 성도의 거룩함은 음란과 색욕에서 떠나는 것이 기본이다. 아내나 남편을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던지는 충격적인 선언은 무엇인가?

    아내를(남편을) 저버리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8).

6. 5절과 7절은 같은 내용이다. 그러면 중간의 6절도 여전히 같은 내용인데 오독(誤讀)의 여지가 있다. 같은 내용이 되도록 다음 몇 가지 표현의 의미를 설명해보자. ‘분수를 넘는다는 것’, ‘형제를 해하는 것’(이 둘은 병렬관계이다), ‘신원’

    분수를 넘는다는 것은 탈선하지 말라는 뜻이고, 형제를 해하는 것은 권리를 침범하거나 속이는 것이다. 우리말 ‘신원’은 원수갚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징계한다는 뜻이다.

7. 1-3장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칭찬과 전도자들의 복음 사역의 동기에 관한 부분이라서 다소 개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4-5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윤리적, 교리적 권면이다. 권면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구체적인 첫 권면사항이 ‘성적인 거룩’이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건전한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건전한 신앙도, 건전한 국가도 세워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성적인 탈선을 범죄 행위라기보다는 단순히 인생을 즐기는 차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도리어 조장하는 풍조도 있었다. 풍류, 한량, 로맨스, 영웅호걸은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당시 헬라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8.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복음의 일부인가?

    분명히 그렇다: 외인을 향하여 단정히 행하고, 궁핍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믿고 지지리도 고생한다는 말보다는 예수믿고 정말 복을 받았구나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복음을 위해서 백번 유리하다. 더구나 자유인은 손으로 일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고 그런 일은 아래 것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헬라인들에게 있었다.

9. 자는 자(죽은 자)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만날테니까(14): 살아있다고 죽은 자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느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의 재림이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죽어버린 성도는 재림에 참여할 수 없지 않는가? 이런 걱정에 대한 대답이다.

10. 한국에도 재림 예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수백명이라더라. 전부 가짜다. 왜?

    초림의 예수는 초라하게 왔을지라도 재림 예수는 그렇게 오지 않는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화려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16).

11. 휴거(끌다携 들어올리다擧) 대소동이라고 할까? ‘끌어 올려’라는 말에서 휴거라는 표현이 나와서 영화도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믿는 성도만 하늘나라로 끌어올려서 데려가고, 남은 사람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데 남은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어떤 방법으로 데려가시느냐에 그렇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전자석이 모래 속의 쇠붙이를 끌어올리듯이! 어미닭이 품었더니 어떤 알은 깨어나고 어떤 알은 썩어버리듯이 저절로 구분될 것이라는 얘기다.

12. 휴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날지 우리는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일에 온갖 관심을 다 쏟을 게 아니라 비슷한 예를 살펴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성경에 어떤 예가 있는가?

    에녹, 엘리야, 예수의 승천, 빌립의 순간 이동, 바울의 삼층천 경험 등에 비추어 상상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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