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
바울: 엄연한 계급 사회이었던 고대에 자신이 복음을 전한 이방인 성도를 향해서 ‘형제’라고 부른 것(1:4, 2:1, 9, 17)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을런지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도 양반 상놈의 구분이 확연하던 때에 예수 믿은 머슴이나 종을 가리켜 ‘00 선생’이라고 부르고 같은 상에서 밥을 먹게 한 것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가! 2.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과 능욕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가리키는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쳤다가 매맞고 옥에 갇혔는데 찬송과 기도 소리에 옥문이 열렸던 그 사건이다(행 16:16-40). 아마도 대적자들은 이 사건의 전말을 호도하여 바울을 전과자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그 일 후에 이들이 다다른 곳이 데살로니가인데 빌립보와 같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성도들도 이 일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3.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하였는가? 싸움: 이 단어의 어원이 ‘경기’에서 나왔다. 전도는 악한 영과 싸우는 것이다. 다만, 치고 박고 싸울 것인지 아니면 사랑으로 녹여버릴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생각은 있어야 한다. 4.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면 될텐데... 바울은 전도라는 말 대신 어떤 말을 쓰는가? 권면(3): 전도라고 하면 전혀 모르는 사실을 전해준다는 의미가 강한데 권면은 잘 하고 있지만 옆에서 조금 도와준다는 듯한 어감을 준다. 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지혜롭다. 4절에도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부탁을 받았다(원어상으로는 하나님께서 믿고 맡기셨다는 뜻)고 한다. 바울의 표현이 조심스럽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초신자들이니까! 5. 권면을 시작하면서 빌립보에서 받은 고난과 능욕을 먼저 얘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의 일이 사리사욕(간사, 부정, 궤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이런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을 강조하려함이다. 사리사욕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이렇게 고생스러운 짓을 왜 하겠느냐? 그러니 아첨이나 탐심의 말을 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 안에는 이곳 저곳을 떠도는 순회 철학자들이 많았단다. 돈과 명예를 위하여 사람들의 인기를 추구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바울이 떠난 다음에 바울을 이런 부류의 하나로 공격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6.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5)이 어떻게 다른가? 아첨의 말은 상대방을 좋게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고 탐심의 탈(가면)은 자신의 일정한 의도를 감춤으로써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다. 전자는 외적인 행위가 강조된 반면에 후자는 내적인 의도가 강조된 표현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아첨하지도 않았고, 불순한 의도를 숨긴 채 복음이 아닌 것을 전한 적도 없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생스러운 일을 했겠는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일이다(4). 7.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라는 말은 난하주에 보면 ‘폐를 끼칠 터이나’라고 되어있다. 짐을 지울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의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7): 유모가 어떻게 자기 자녀를 기르나? 그러니까 여기 유모는 실제로는 어머니인 셈이다. 양육한다는 점에서는 어머니지만 잘 양육해도 자기 자녀가 아니란 점에서는 유모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애매한 표현을 쓴 게 아닐까? 8.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8).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누리기보다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주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성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8): 물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람의 반향(메아리)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먼저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다른 성도에게 그럴 수 있다. 9.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1차적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의 수고와 애쓴 것(9)이 무엇인가? 밤낮으로 일한 것: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바울을 가리켜 사리사욕을 취하려고 했다는 비난에 대한 효과적인 방비책이다.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일단은 개인적인 탐심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하기 위해서 목사는 가능한한 청빈하고 가난해야한다. 물질에 욕심을 버려야 한다. 10. 흔히 우리는 어떻게 말씀대로 다 실천하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10)?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런 삶을 가능케 하였는가(12)?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하였다’고 말한다.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선입견일 뿐이다. 11. 바울은 자신을 어머니에 비유해서 말하더니(7) 여기서는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다(11). 무슨 차이가 있는가? 어머니는 젖먹이를 양육하는 듯한 태도를 말하고 아버지는 좀 자란 아이에게 훈육하는 듯한 자세를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어머니 역할도 하고 아버지 역할도 다 했다. 홀애비(?)가 참 별 일이다! 12. 바울이 이렇게 간절하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권면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12)?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함(12) =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는 것 = 하나님께 합당한 신부가 되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루려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기에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이 바울의 목표이다. 고후 11:2과 다르지 않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13.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받은 말씀은 바울의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오늘 우리의 예배 시간에 들려지는 설교말씀은 목사의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복이다. 분명히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건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을 외치는 자가 적지 않다. 14. 어디서나 개종에는 박해가 따른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동족에게 고통을 받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다고 하는가? 개종한 유대인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는 것: 데살로니가 성도들만 그런 아픔을 겪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 같은 박해를 이겨낸 데살로니가 성도나 유대인 성도는 동일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15. 유대인들의 죄가 무엇인가(15-16)?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금한 것이다: 이러면서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죄를 돌리라고 큰 소리 치더니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고난을 당했다(≒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을 예수와 선지자들과 동일한 선상에 올려놓는다. 자신들이 사도로 인정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이 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16. 사도 바울이 형제들을 잠시라도 ‘떠나게 된 것’의 원어상 의미는 ‘고아가 된 것’이다. 그 형제들을 향해서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 바울의 심경은 어떤 사람에 비하면 좋을까? 어쩔 수 없이 헤어진 형제, 혹은 잠시 떨어진 연인: 좀 심하지 않은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정말로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복음을 전해본 사람만이 아는 감정이다. 17. 사도 바울이 형제들을 잠시라도 떠나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이긴 하지만 사실은 야손과 그 나머지 성도들을 염려해서 일단은 바울이 혼자 떠났다(행 17:9-10). 돌에 맞아 죽었다고 갖다 버려도 이튿날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가던 바울이(행 14:19-21) 대적자들이 무서워서 피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얼마나 보고 싶어했을까! 그런데 왜 돌아가지 못했는가? 사단의 역사(18): 아마도 유대인들의 박해보다 몸의 질병(고후 12:7)이나 다른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가령, 고린도에서의 바쁜 사역).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것들도 성령의 역사였다. 18. 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께서 강림하실 때 바울에게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이 되는가? 복음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