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3서


1. 가이오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서신이 어떻게 성경에 포함되었을까?

    실제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은 틀림없지만 당시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나 감독도, 성경도 없던 시절에는 교회를 누가 돌아보았을까? 이 곳 저 곳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교회를 돌보았던 형제들(나그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순회전도자)이 이방인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보조를 받지 않고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할 때 형제된 너희가 그들을 대접하고 필요한 것을 채우라는 권면은 초대 교회에서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음이 틀림없다.

    요한3서를 생각하면 흔히 삼중복음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현실적인 복을 강조하는 구절로 인식하게 되면 한 부분이 너무 강조되는 셈이다. 영육간에 고르게 성장해야 하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영적인 부요이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삼서의 핵심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그네된 자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2. 2절은 영혼이 잘 되라는 것인가, 아니면 범사에 잘 되라고 하는가? 우리는 어디에 더 관심이 많은가?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것인지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는 아무래도 범사에, 즉 세상 재물의 복에 더 치중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말씀은 ‘영혼이 잘 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처럼 부수적으로 세상 재물과 건강의 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적인 부를 누리기 위해서 영혼이 잘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물질의 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이 이용되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처럼(마 6:33의 오해).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생활도 가난한 사람에게 이 구절은 어떤 의미인가? 범사에 잘 되는 것이 믿는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그래서는 안된다. 시작은 그렇게 했을지라도 결국은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최종목표이어야 한다.

3. 가이오는 어떤 사람인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3), 사랑을 실천하는 자(6)

4. ‘목사가 이렇게 고생만 하고 힘이 드는 줄 몰랐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목사 되려고 하지?’ 아주 늦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모가 된 분의 푸념이다. 정말 왜 그럴까?

    돈도, 명예도 주지 못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르친 성도들이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4). 아이들이 병아리를 키우는 것도 그렇게 신기하고 꽃을 기르고 채소를 가꾸는 것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거든 하물며 생명을 구하는 일에 얼마나 큰 즐거움이 있을까?

5. 가이오에게 하는 말(5-6)이 지나간 일에 대해서 칭찬하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인가?

    양쪽 다: 지금까지도 잘 했지만 앞으로도 그 일을 더 잘 해주기를 당부하는 말이다.

6. 가이오가 나그네된 자들에게 신실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간 자들이 이방인에게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이방인에게 가서 아무 것도 받지 않았을까?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그네된 자들이란 전도자들이다. 그들이 돈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케 하고자 돈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은 돈이 필요한데도 복음을 위해서 이방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았으니 이것을 아는 너희가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말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 너희가 그런 분들을 대접하고 돌본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가!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돈 때문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사례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런 사정을 알만한 성도들이 그릿 시내의 까마귀가 되라는 말이다. 선교사들이 교회의 후원을 강력히 요청하면서도 현지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7.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것(8)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주의 이름으로 이방인에게 나가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한 형제들을 영접하는 것: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선교사들을 뒤에서 돕는 것이나 거처할 곳이 마땅찮은 선교사들의 필요로 채워주는 것들, 가난한 목사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말한다. 복음을 위해서 힘들게 애쓰는 이들을 위해서 도와주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8. 디오드레베가 위대한 사도 요한에 대해서 악한 말로 폄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으뜸이 되려고(9):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거야 악한 심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당연한 일 아닌가? 성도는 약한 형제를 일으켜 세우고, 희망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여기서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식사나 교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사도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뜻이다.

9. 나쁜 말을 한다 해도 용서해야지 그걸 잊지 않으면 돼나(10)? 더구나, 말끝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는 요한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요한2서 1:10-11에 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의 편지를 무시하고 전도자를 영접치 않고 그렇게 하는 교인들을 내어쫓은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10. 요한이 이 편지 이전에 다른 편지를 보냈지만 디오드레베가 그 내용을 거부했고 가이오는 순종했던 모양이다. 그 전 편지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형제들을 대접하라: 10절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1.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기 때문이다(11):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사람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본받는 경향이 있다.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가르쳐주지도 않는 욕을 먼저 배우는 것이 그 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것을 본받도록 더 적극적으로 애써야 한다.

12.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뵈옵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 ‘선’이 단순하게 착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느냐 마느냐의 얘기다. 그렇다면 이 말이 디오드레베를 어느 정도로 책망하는 말인가?

    디오드레베는 이단이다. 그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는 선언이다.

13. 사도가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참고하면 데메드리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디오드레베가 일으켜 놓은 문제를 수습하려고 보낸 사자: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수습전권위원이 아니었을까?

14. 요한 3서는 먹과 붓으로 썼다. 요한 2서는 뭘로 썼더라?

    종이와 먹(요이 1:12): 종이는 아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이 때는 당연히 파피루스로 만든 종이였다.

15. 사도의 권위마저 인정치 않는 이런 사람이 있는 교회에 이렇게 짧은 서신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이 편지의 결과는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워도 교회마다 읽혀지고 정경에 삽입되었다는 것은 효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사도 요한의 권위가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유위부족(猶爲不足): 오히려 모자람 (~해서: 그것도 모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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