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3장


1. 2장에서 이단의 유혹이 빠지지 않도록 권면한 요한이 3장에서는 또 ‘서로 사랑하라’ ‘범죄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요한은 무엇이라고 하는가?(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주를 향한 소망 때문이기도, 3):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는가(1)? 우리 죄를 없이 하시려고 그 분이 나타나셨는데(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느냐(5)? 하나님의 사랑이 만병을 다스리는 약이다. 덮어놓고 ‘죄지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먼저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2. 그리스도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본문의 표현을 이용하여 대답한다면? ‘저 놈 참 이상한 놈이야’, ‘야, 무슨 재미로 사니?’, ‘도대체 왜 그래? 지금이 어느 땐데 케케묵은 소리하고 있어?’, ‘돌았니?’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람(1): 불신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성도에게는 반드시 있다. 실제로 이기적이거나 어리석게 처신해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

3.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은 컨닝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다른 누구 때문이거나 법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더럽힐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장차 하나님을 대면할 자이기 때문에(2, = 주를 향한 소망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온전하지 않지만 장차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볼 것’이므로 우리를 더럽힐 수 없다. 현재보다는 장차 될 일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요구를 한사코 거절한 것과 비교해보라.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거지 신세로 전락했지만 끝내 자신을 거지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거지 왕자는 결국 자기의 자리를 찾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삶이 아니라도, 다른 학생이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삶이 못 된다 해도(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누구인가?

4.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왜 이렇게 무력한가? 겁도 많고 못 하는 일도 많고... ?

    현실보다는 장래의 모습을 그리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마 5:48). 지금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거나 말거나 장래에는 우리가 그 분과 같아질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해야 한다. 그 날이 되면 우리도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될 것이다(빌 3:21).

5. 요한이 이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자신들이 가진 ‘영지(영적무지로부터 해방된 영적 통찰력)’로 인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거리낌없이 행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어떤 행위도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지적하는 말이 무엇일까?

    죄는 불법이다(4): 그걸 누가 모르나?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자들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만이 죄가 없으시다(=죄를 없앨 자격이 있다)고 강조한다, 아니, 죄를 없이 하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뿐임을 강조한다.

6. 그 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으며(6),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9)고 하는데 우리는 어떤가?

    여기서 말하는 ‘죄’는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범죄를 말한다. 본의가 아닌 실수나 욕심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잘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7. 아무리 마귀지만 100% 죄만 지을까?(8)

    처음부터 범죄함이란 100% 죄만 짓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역의 무리에 가담했다면 그 무리 안에서 행한 어떤 선한 행위도 선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8. 혹시 잘못했을 때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는 것은 우리 속에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씨(9):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시 119:11, 렘 31:33)과 성령(롬 8:11, 고전 3:16)일 것이다.

9.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는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의를 행치 않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이다(10): 물론 이 경우에도 결과보다는 동기적인 측면을 더 중시해야 한다.

10.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다. 요한은 여기서 가인의 죄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의를 행치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치 아니함, 혹은 동생의 의로움에 대한 시기.

11.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 무엇인가?(14) 좀 이상한데?

    형제를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 자의 외적 증거 중에 하나일 뿐이다.

12. 형제를 미워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15-16)

    그가 우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16): 우리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 분이 목숨을 버리셨는데(요 15:12-13) 우리가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미워하는 것이 곧 형제를 죽이는 것이니(15), 그 분이 목숨을 버려 살려놓은 형제를 우리가 죽일 수는 없다.

13. 가인과 아벨을 짝지으면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가인과 예수를 짝지어 놓은 셈인데, 어떻게 짝이 되는가?

    형제를 죽인 자와 형제를 살리는 자

14. 인간의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I love you는 I love myself through you라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이기적인 면이 강하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랑: 무조건적이요, 내리 사랑이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사랑이다.

15. ‘형제의 궁핍함’이란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뜻한다.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일할 곳도 없는 경우 말이다. 그런데 게을러서 궁핍한 것은 어떡하지? 아예 도와줄 것을 기대하고 궁핍을 즐기는 자는?

    무조건 퍼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점을 기억하면서 도와야한다. 본문의 ‘보고도’라는 말은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말한다. 당연히 도와야 할 처지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어떻게 도와야할지를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도와주어야 한다.

16. 요한이 독자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다. 그러면서 노파심에서 당부하는 말은 무엇인가?

    실천하라(18):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행함없는 믿음이 믿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행함과 진실함이 따르는 법이지만 노파심에서 사족을 덧붙인 것이다.

17. 요한의 말처럼 그렇게 사랑을 행하면 사랑받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사랑을 실천하는(주는) 사람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을까?

    받는 사람보다 더 큰 유익이 있다(19, 21-22)):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되는 유익이 있다. 이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체험하는 기쁨이다. ‘하나님 앞에 담대함’이나 ‘기도의 응답’이란 보너스도 있다(21-22). 주의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이 모든 것들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아니다. 믿는 자의 의무일 뿐이다.

18. 혹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을 수 있다면(20) 그게 무엇일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을 경우의 양심의 찔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형제 사람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는 말이다.

19. 어떻게 주 안에 거할 수 있는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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