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 |
형제와 신령한 것(혹은 성령, 혹은 하나님의 영): 말 못하는 우상이 어떻게 이방인들을 끌고 갈까? 말 못하는 우상 뒤에 말하는 인간이 있어서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끌고 간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끄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스스로 끌려가기도 한다. 일종의 사기다. 속고 살았다는 말이다. 2. 이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주제는 ‘신령한 것’(1)이다. 이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7-11): 영적인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3. 성령받은 증거가 무엇인가(3)?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하는 것(마 16:17):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하고 즉시 성령을 받았는가? 아니면 오랜 후에 받았는가? 우리는 오랜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받은 사람에게 또 주시는 특별한 은사였다. 방언이나 신유는 성령을 받은 자가 누리는 특별한 선물이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했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성령을 주셨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4. 예수를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능력도 많다. 누구는 저런 능력으로 귀하게 사역하고 있는 데? 내게는 왜 이런 능력이 없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의 능력은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능력만 크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은사를 보고 감탄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주신 한 분이신 성령, 주, 하나님(4-6): 삼위일체 하나님이 은사의 본질이다. 우리는 은사의 현상에만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보다는 아버지의 손에 들린 과자봉지에만 집착하는 아이처럼! 우리를 각자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다른 형제의 은사를 질시하기보다는 감사할 수 있어야) 그 분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주셨으므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다. 비유컨데 나다나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주인공 어니스트는 평생토록 자신에게는 은사가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자신이 바로 은사 자체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5. 하나님이 삼위일체이듯이 은사(카리스마톤), 직임(디아코니온), 역사(에네르게마톤)도 삼위일체다(4-6).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고, 주께서 직임을 주셨으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을까? 은사는 직임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직임은 그런 은사를 가진 자가 담당할 분야(봉사, 수행, 연보)이다. 역사는 은사를 가진 자가 그 분야에서 실제로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각자가 맡은 분야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유익을 위함(7):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란 뜻이다. 은사의 근원은 하나님, 은사의 목적은 ‘형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다(칼빈). 그래서 교회는 하나이지만 은사를 다양하게 주셔서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가지게 하셨다. 그렇게 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 같은 은사를 주시면 교회는 마치 벽돌공장에 끝없이 쌓아놓은 벽돌더미처럼 된다. 제대로 된 건물이 되려면 문짝도, 창문도, 지붕도, 화장실도, 보이지 않는 정화조, 하수도도 있어야 한다. 7. 성령의 은사라면 흔히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을 가장 먼저 말하는가? 가르치는 은사(8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28절: 사도, 선지자, 교사): 병고치는 은사, 방언이나 통역은 훨씬 다음이다. 병고치는 은사가 낚시의 떡밥에 해당한다면 가르치는 은사는 낚시바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지 못한다. 찬양집회도 비슷한 우려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8. 바울은 모든 은사를 다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몇 가지 대표적인 은사만 지적했을 뿐이다. 여기서 9가지 은사를 지적했다고 해도 되겠지만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을 잘 보면 달리 분류할 수도 있다. 몇 가지 은사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을까? 세 가지: ‘다른 이에게는’이라는 표현을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다. 9절의 ‘다른 이에게는’이란 표현은 8절과 구별짓게 하면서 연이은 4개의 ‘어떤 이’와 한 그룹으로 이적적인 능력을 가진 그룹이다. 그러면 8절의 두 ‘어떤 이’는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그룹이고 10절 중반의 ‘다른 이’와 그 다음의 ‘어떤 이’는 방언의 은사를 가진 그룹이다. 9. 은사로서 지혜와 지식은 어떻게 다를까? 지식: 말씀을 가르치는 이지적 은사 10. 초대교회 시절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신학교도 없었다. 자칫하면 가짜 성경이 판을 칠 수도 있고 가짜 사도들이나 가짜 교사가 설칠 수도 있었다. 사도 바울조차 가짜 사도 시비에 말려들었을 정도이니 사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럴 때 특히 필요한 은사가 무엇이었을까? 영들 분별함(10): 자칭 사도, 혹은 선지자, 교사라고 주장하고 설교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당시에는 교회를 지키는 데에 아주 중요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목사가 수도 없이 많은 현재에도 사이비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는 말씀을 통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11. 엘리야, 엘리사가 행한 많은 이적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임을 당한 것(행 5:1)이나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것(행 13:11)도 은사다. 이런 것은 무슨 은사라고 하는가? 능력행함(10): 이것은 아주 포괄적인 표현이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특별한 역량을 보임으로 교회를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12. ‘예언함’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를 가리킨다. 예컨데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증거를 찾아 가르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 의미일까?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하여 가르치는 것: 점쟁이처럼 내일을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죽을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신 18:10-14). 13.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그리 유익하지 않다. 은사는 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14.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대단히 능력있는 성도들이었던 모양이다. 다양한 은사를 가진 분들이 즐비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잘난 사람들이 많으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단다. 사공을 쫓아 내버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12-27)? 각 지체가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한 몸이란 것을 기억하라. 15. 12절의 문장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문맥이 자연스럽도록 한 단어만 다른 단어로 대치시켜보자. ‘그리스도’를 ‘교회’로: 그리스도를 교회와 동의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과연 동의어인가? 믿는 성도가 연합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표현을 넘어서 바로 그리스도이다. 16. 발과 귀가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했는가? 난 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다(몸에 붙지 아니 하였다): 몸에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떨어져 나갈 수도 없거니와 떨어져 나가 살 수도 없다. 세례를 받고 한 몸이 되었으니 죽으나 사나 한 몸이다. 제 역할만 잘 하면 된다. 유기체적인 협력을 당부하는 말이다. 17.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나 엄청난 충격파가 몰아쳤다. 불신자들에게 충격적이리만치 선한 행실을 보여줌으로 끝없는 박해 가운데서도 교회는 성장하였다. 본문의 어떤 표현이 당시의 불신자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말이었을까?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몸이 되었고(13): 종과 자유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지배적인 지금도 대기업의 사장과 말단사원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출세한 어릴 적 친구를 만나고 온 사람이 ‘걔는 더 이상 우리의 친구가 아니더라’고 한다. 반갑게 맞아주고 옛 우정을 되새기며 즐거운 시간을 나누고 왔음에도 더 이상 같은 친구라고 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하물며 그 옛날 종과 자유자가 하나다? 아마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한 몸이 되었다는 것도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절대로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양반이 상놈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18. 모든 지체가 명심해야할 것 세 가지가 있다면 무엇인가(15-21)? 1) 지체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라(15-16): 코가 손을 보고 한 몸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그 몸을 떠난다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성령으로 하나된 성도는 남이 아니다. 조금 뜻이 다르다고 해서 교회를 나누고 갈라지는 것은 몸을 쪼개는 짓이다. 교회를 나누는 행위를 자신의 몸을 도려내는 아픔없이는 하지 말라. 19. 우리 몸에서 가장 소용없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 요긴하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보라. 신앙으로 살려는 남자아이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려는 꿈을 꾸는 경우가 더러 있다(마 19:12). 신앙생활에 도움은커녕 심각한 방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란 것을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20. 은사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6, 22, 24)?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신다(6)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는 은사가 있다는 말이다. 21.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났는데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답은 한 아이의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었는데 반대편 아이가 울면 한 사람이고 울지 않으면 두 사람이다.’ 이스라엘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집결하여 함께 싸운 것이 이런 사고방식에 연유하였을 것이다. 바울의 설명대로 하면 우리가 한 몸인 증거는 무엇일까? 고통도 영광도 함께 하는 것(26). 22. 하나님께서 교회의 일군을 세우셨는데 왜 목사가 없지? 역할을 보면 선지자나 교사가 오늘날의 목사인 셈이다. 23.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8-10절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28절에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추가되었다. 24. ‘다 ∼ 겠느냐?’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29-30). 다 같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은사가 부럽다 못해 시기심마저 생긴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되지 못함(26-27): 부러운 은사를 가진 형제를 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지체이므로 그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이요, 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면 시기할 이유가 없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므로 그가 영광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영광받는 것이므로 함께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 25.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면서 사도 바울이 보여주겠다는 제일 좋은 길은 무엇일까? 14장 1절을 참고하면 13장에 나오는 ‘사랑’을 정답으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더 큰 은사’가 있다는 말로 들린다. 14장의 예언의 은사: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매력적이고 대중적인 방언의 은사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다른 더 소중한 은사를 사모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잘 보면 예언의 은사라는 것이 곧 말씀을 분별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말한다(3, 6, 19). 결국 사랑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가장 귀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