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장


1. 헬라어 원문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앞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10장의 어떤 내용이 9장과 관련이 있는가?

    버림이 되는 것(9:27과 10:5):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버림을 당하는 수도 있는가?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성도의 견인(보존)이라는 것도 있던데? 목회적 필요에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학비는 없다!” 일종의 공갈이지만 말도 못하나? 사고만 쳐대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러다가는 버림을 당할 수 있다고 야단치는 것이다.

2.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알라는 말인가? 설마 출애굽 사건을 모르지는 않을테고...

    출애굽의 영적 의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구름 아래) 확실한 구원의 체험을 하고서도(=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순종치 아니하다가 멸망당한 것을 알라는 말씀이다.

3. 사도 바울은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을 무슨 의미로 해석하는가?

    세례: 구름 아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말이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여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그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세례로 해석한 것이다.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집례자? 아니면 방식(세례, 침례)?

4. ‘다 같은 신령한 식물(=만나)과 음료를 마신 것’을 무슨 의미로 해석하는가?

    성찬: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성례는 이 세례와 성찬 두 가지다. 성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집례자? 아니면 음료와 떡? 음료와 떡의 출처가 중요하다.

5.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였다는 것은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염두에 둔 표현인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롬 6:3-5).

6. 다음 말씀에 ‘신령한’이란 표현이 왜 공통으로 쓰였을까?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3-4)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셨던 만나와 물이 자연적인 음식과 물이 아니라 ‘신령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특별하게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조상들은 신령한 반석에서 난 신령한 식물과 음료로 구원을 받았다.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주신 신령한 선물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7.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함께 성례에 참여하였음을 기억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례에 참여하고도(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서도) 멸망당한 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라는 것.

8. 과거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거울(본보기)이 되는 것: 역사에서 교훈을 받지 못하는 민족은 장래가 없단다. 비단 성경말씀이 아니라도 지나간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거울이란 흔히 ‘본보기’로 번역되기도 했다.

9. 악을 즐겨하는 자가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악을 즐겨했을까? 관주에 있는대로 민수기 11:4-5, 33-34를 참고하면 이 말은 탐욕을 품은 자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7절을 언급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떤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일까?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을 품은 자: 곧 우상제물을 먹음으로 우상숭배에 빠지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금하신 것을 먹고 싶어하는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만큼 은혜를 베풀었으면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

10. 6-7절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뜻이라면 8:8, 10:25절과 어떻게 다른가?

    단순하게 식사용으로 먹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노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우상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말이다.

11. 간음이 그렇게 큰 죄인가? 간통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외국에서는 사적인 것 부분까지 국가가 간여해서 안된다는 취지로 간통죄라는 것이 없는 나라도 많단다. 후진적인 법이라고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적인 사랑놀음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책망하시는가?

    여기서 말하는 간음은 곧 우상숭배 행위이다: 조상들이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받아서 행음한 것(민 25:1-9)은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행위이었는데, 고린도에는 비너스를 섬기는 과정이 그와 똑같았다. 단순한 간통의 의미를 넘어서 우상숭배와 동일한 죄목이기 때문이다.

12. 어떻게 주를 시험하였는가(9)? 기드온도 하나님의 사자를 시험했는데? 시험해보라고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와중에서도 고의적으로 대항하는 것(=능력 있으면 때려 봐!): 불쌍해서 봐주거나, 사랑 때문에 참고 있는데 알지 못하고 계속 대들면 심하게 혼이 나는 법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명확한 증거를 거부하는 행위를 가리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 즉 성령훼방죄라고 하신 것과 비슷하다. 이래도 우리를 용서하실 걸?

13.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은 우상숭배, 간음, 시험, 원망이다. 이런 것들은 전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저지를 가능성이 있거나 현재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간음은 우상숭배의 절차이고, 시험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면 원망(10)은 우상숭배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반항 아닐까? 고라의 무리들이 징계를 받은 후에 백성들이 지도자를 원망했다가 염병이 돈 것(민 16:41-46)을 염두에 둔 말씀이리라.

14.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는 말씀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조상들처럼 그런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우상숭배, 간음, 시험, 원망하던 자): 이미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았으니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는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우상의 제물을 먹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15.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은 것(7-10)을 말씀하시는 이유(=결론)가 무엇인가?

    시험에 들지 말라(13):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시험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16.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혜 있는 자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 지혜 있는 자들에게만 말한다는 말인가

    달래는 셈이다: 너희가 그 정도 지혜는 있지 않느냐? 이 정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17.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참예함 = 코이노니아)이요 모든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이다.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하더니 갑자기 성찬을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우상 숭배와 성찬의 외형상 공통점이 무엇인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 공통점은 먹는 것:

18. 10장에는 먹는 것에 대한 예를 세 가지나 들고 있다. 그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먹음으로 하나 되는 것: 구약의 조상들이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여함이요, 고린도인들이 우상의 축제에 참여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이고, 성도들이 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다. 구약 제사를 예로 든 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결과(우상과 하나 됨)를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19.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상의 신전 축제에 가서 노는 것도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 생각하면 안 되나?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뒤에 귀신이 있기 때문이다:

20. 불신자들은 귀신도 섬기고 예수도 섬기면 둘 중에 하나라도 맞히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게 왜 안 되는가?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기 때문(22): 구약의 표현을 빌리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이 좁으신가? 진정한 사랑에는 독점욕이 있다.

21. 행동의 근거가 합법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하다. 법은 인간의 행위의 최소치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근거로 행동을 해야 하나?

    덕을 세우는 것이냐 아니냐(23) = 남에게 유익하냐?: 이웃이나 형제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서 자신의 자유함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질까? 앞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도적 특권과 자유를 포기한 것이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22. 한국교회가 술과 도박을 금지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정말 잘 한 일이었다. 현재도 그래야하느냐는 것에 대해서 반론도 있지만 금지하는 것이 유익이 더 많다고 본다. 대학시절의 일인데,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절대 술을 먹지 않는 내 생일을 축하하느라고 술집 아닌 곳을 찾아 장시간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축하받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술집을 피해야 하는가?

    결국은 조용한 맥주집에서 축하잔을 함께 들었다: 그 술잔이 종교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므로 굳이 사양할 의미도 없다. 가령, ‘너 예수쟁이지?’ 그러면서 억지로 먹이려고 한다면 그거야 목숨 걸고 싸울 일이다.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의미가 이런 것이다. 차려 놓은 음식이야 먹으면 되지만 굳이 제물이라고 한다는 자체가 종교적인 시험인 셈이다. 그러면 못 먹는다. 음식 자체는 제물이든 아니든 아무런 효험이 없다.

23. 29절의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란 표현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남의 양심 때문에 내 자유가 제약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28절과 연결이 잘 안 된다. 28절은 일단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문맥을 따라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문맥으로 본다면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다른 사람의 그릇된 판단을 불러 일으켜서야 되겠는가?’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잘못이야 당연히 그릇되게 판단하는 (연약한 양심을 지닌) 남 탓이지만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맥이다.

24. 어떻게 하는 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이 될까?

    먹든지 마시든지 자유지만 그것이 형제에게 유익이 되느냐 마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하는 자의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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