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 |
백성들의 마음을 구하는 일: 백성들이 기꺼이 다윗의 뜻에 따르도록 의논하고(1) 협조를 구한다(2). 지도자가 독단으로 처리하거나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추진해야 할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백성들과 함께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도자다. 더구나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다윗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온 백성의 일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백성들과 의논하고 뜻을 모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그럼에도 실패한 것은 결과적으로 더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말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2절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일을 해야한다. 하나님께 방법까지도 물었어야 했다. 3. 본문을 근거로 생각하면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묻는 것(신본주의)과 묻지 아니하는 것(결국 인본주의): 사울은 통치기간 내내 하나님의 궤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게 다윗과 다른 점이다(삼상 14:18에서 단 한번 궤를 언급한 적이 있기는 함). 다윗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이 얼마나 그 인생을 복되게 하는가(삼상 23:2, 30:8, 삼하 2:1, 5:19, 23)! 사울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실패했다면 다윗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는 신본주의적 왕조였기에 가장 위대한 왕국을 이룰 수 있었다. 4. 이스라엘의 전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라는 말이 있다. 사무엘 시대의 이스라엘은 아주 좁은 지역이고 사울이 그렇게 확장시키지도 못한 것 같은데 다윗이 말하는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는 더 넓은 땅이다.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며 여호수아 시대에 각 지파에게 나누어준 땅이다(민 34:5-8). 5. 다윗이나 백성들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흔적이 무엇인가? 새 수레(7),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였다(8): 그럼에도 진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헛 일이다. 선한 동기, 좋은 목적, 헌신적인 열심이라도 하나님의 방식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 새 수레를 사용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궤를 가져올 때 사용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80년 정도 지난 일인데 그것을 흉내냈다기보다는 단순하게 옮길 때의 편리함만 생각한 탓일 것이다. 의논을 천부장과 할 게 아니고 제사장과 했더라면 실수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텐데... 6. 옳은 일이라고, 좋은 일이라고 함부로 행하지 않아야 한다. 더욱 조심하고 자세히 짚어가면서 해야 한다. 여호와의 궤를 운반하는 데 첫 시도에서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15:2절을 참고하자? 메지 않고 수레로 옮긴 것(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지만): 5, 6절에 다윗이 메어 오려했는데 누가 수레에 실었나? 원문에는 메어 오려고 했다는 말이 없다. 그냥 옮겨오려고 한 걸로 돼있다. 아마 번역자가 법궤의 이동에 따른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한 모양이다. 7. 웃사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회개할 기회나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이렇게 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 원래 하나님의 거룩함에 손상이 되는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즉각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범죄한 우리 인생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8. 원래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엘르아살이었다(삼상 7:1). 그런데 왜 웃사가 수레를 몰고 나올까? 웃사는 엘르아살의 아들일 것이다. 대를 이어서 하나님의 궤를 돌본 셈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말이다. 9. 웃사가 사고를 당한 장소는 나곤의 타작마당이었는데(삼하 6:6) 여기서는 왜 기돈의 타작마당일까? 나곤(충돌)이나 기돈(재앙)이 둘 다 일반명사이거나 혹은 둘 중의 하나만 고유명사일 가능성이 있다. 10. 타작마당은 평탄한 곳임에 틀림없는데 왜 소가 뛰지? 하나님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물론 웃사나 다윗이 알아차리지는 못했던 일이다. 요나가 배를 타고 도망갈 때 풍랑이 일어나고 선장이 바울을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자 유라굴라가 닥친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짓을 하면 멀쩡하던 소가 뛰는 것이다. 11. 다윗이 분했다고? 하나님께서 치시는데 분했다고? 자신을 향한 자책일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12)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를 품었을 리는 없다. 12.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있었는데 복을 주셨다면 아비나답의 집에는 왜 아무 말이 없지? 그 집에 얼마 동안 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는 방법이 대략 다음과 같다. 70~80년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13. 웃사와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궤를 취급하는 자세를 비교해 보자(삼상 7:1 ↔ 14). 웃사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에 오래동안 있었던 궤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아버지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아비나답이 아들을 거룩히 구별했다는 것은 ‘이 일은 네가 맡으라’는 식으로 떠 넘겨버린 셈이다. 그런 일을 손자가 이어받았으니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려는 마음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오벧에돔은 웃사가 죽은 것을 보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속과 함께 했다는 것은 기쁨으로 돌보았다는 말이다. 26:1-4에 보면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궤를 매도록 임무를 받은 (가드림몬 사람)고핫의 자손이다. 아마 실수의 원인을 깨닫고 자신이 나섰을 수도 있다. 웃사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궤를 자기 집에 들이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벧에돔에게도 억지로 진 십자가였을 것이다. 매를 든 아버지일수록 그 다음에 더 잘 해주는 것을 아는가? 매를 댄 것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제대로 된 부자지간이라면)! 14.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운반할 때는 수레에 싫어서 저절로 가도록해도 별 일 없었는데 다윗의 경우에는 왜 안 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 무슨 짓을 어떻게 하든 (물론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많이 죽었지만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방법을 몰라서) 별 관계가 없으나 다윗의 경우는 내 자식이므로 내 법에 따라야 한다. 외부 활동에 아주 적극적인 어느 권사님이 생일을 맞았다. 신랑이 밖에서 축하해줄 사람이 하도 많으니 자기까지 나서서 귀찮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해서 입으로 떼웠다가 혼이 났다. ‘다른 사람의 축하가 무슨 소용이냐?’고 난리가 났다. |